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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16. 대안학교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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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풀무학교는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학교입니다. 교장이라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또 언론에 마치 내가 풀무학교를 이끌어온 것처럼 비치는 것도 옳지 않아요. " 충남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홍순명 (63) 교장은 시종 취재에 응하기를 머뭇거렸다.

대안학교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 여기 있소!" 하며 선뜻 나서질 않아 취재에 애를 먹인다.

자기 갈 길을 갈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하나, 대안학교마다 교육관이 다르다는 점도 어려움. 다만 '아이들의 개성을 길러주는 인간교육' 이라는 출발점에선 인식을 같이 한다.

지난 9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안학교' 라는 용어를 쓴 고병헌 (39) 성공회대 교수 (교육학 박사) 는 대안학교의 공통된 목적중 하나가 자연과 노동 속에 어우러진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어서, 많은 대안학교가 도심을 벗어나 자연 속에 자리잡는다고 말한다.

"대안학교는 입시로 상징되는 경쟁 이데올로기의 제도권 교육을 부정하고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교육하고자 실천되는 다양한 형태의 모든 교육운동을 말합니다. 대안학교는 지역과 시대 상황에 따라 내용과 형식을 바꾸어가는 능동적 운동입니다. "

대안학교에 대한 논의는 최근 이루어졌지만 한국 대안학교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초기 모습을 보인게 경남 거창고와 홍성의 풀무학교. 지난 56년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 전영창 (1917~76) 선생은 대전신학대 부학장직을 마다하고 '벽지 교육' 의 뜻을 세우고 빚으로 폐교 직전이던 경남 거창고의 교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유명한 '직업선택의 십계' 등을 내놓으면서 거창고를 전인교육의 모범이 되는 대안학교로 키워냈다.

풀무학교는 무교회주의파의 김교신.함석헌.노평구 선생등과 함께 활동하던 이찬갑.주옥로 선생이 58년 설립, 한국형 대안학교의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홍교장은 '대안학교' 보다 '작은학교' 로 불리기를 원한다.

"우리 학교 교육은 성적이라는 잣대로 학생을 줄세우는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일등이나 꼴찌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경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친화하도록 키우려는 것이죠. " 홍교장은 '머리도 꼬리도 없는 (無頭無尾)' 이 학교에서 1960년부터 공동체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이후 85년 현장 교사들이 제도권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터진 '민중교육' 지 사건은 교육의 중요성을 전 사회적으로 파급시킨다.

"교육현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젊은 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한 첫 사건이었지요. 참교육을 지향하는 우리를 군사정권은 '의식화 교육' 을 부추기는 빨갱이로 몰아세웠지요. " 이 사건으로 해직교사가 된 이철국 (45) 고양어린이신문 자문위원의 말이다.이후 교사들의 참교육 운동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 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교조 운동이 내세운 목표는 제도권 교육의 개혁. 일반인에게 정부 교육정책의 문제점을 알리고 공감을 얻어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교육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교육계를 중심으로 일부 제도권밖 생활현장에 대안학교를 차리기 시작했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직을 버리고 '주민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든 교육 실현' 을 목적으로 변산공동체학교를 일구고 있는 윤구병 (56) 씨,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산타바버라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96년 지리산 자락인 경남산청군신안면외송리에 간디학교를 세운 양희규 (40) 씨등이 대표적.

또 전영창 교장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거창고 교장을 역임한 전성은 (57) 현 샛별중 교장, 거창고 출신의 도재원 (57) 현 거창고 교장 역시 대안학교를 통해 이상적 교육을 실천하는 인물들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시민운동권에서도 교육권리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대안학교 운동에 뛰어든다.

전남 담양 한빛고 안행강 (57) 교장은 광주 '여성의 전화' 이사장과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광주지부회장으로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며 서울 다물자연학교 김영식 (40) 교장은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에서, 경남 마산 들꽃온누리학교 김상노 (34) 교장은 최연소 광역의회의원으로 당선돼 교육사회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경기 가평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 (63) 교장은 60년대부터 고 장기려박사 등과 함께 의료보험의 초기 형태인 '청십자' 운동을 벌였으며, 풀무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교육운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대안학교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다.

96년부터 대안학교 설립을 준비, 지난 3월 개교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에 모인 14명의 교사들이 대표적인 인물들. 전 서울 중앙고 교사였던 김창수 (42) 씨가 주도한 푸른꿈고 설립 추진 과정에는 감리교신학대 송순재 (48) 교수 (교육학 박사) 도 참여, 학교운영의 이론적 바탕 마련을 도왔고 김경남 (50) 교장은 NCC인권사회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소설 '어둠의 자식들' 에서 빈민운동가로 그려진 허병섭 (59) 목사도 이 학교 생태교사로 참여하고 있으며 나머지 교사들은 모두 대학원을 마쳤거나 현재 수학중. "자연만큼 중요한 것이 학생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자연으로의 회귀와 함께 산업 현장에서의 교육에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

80년대 노동자 야학교사 활동을 했던 부천실업고 이주항 (39) 교감은 자연 속으로 파고 드는 일반 대안학교의 프로그램과 달리, 공장 지역 한 가운데 대안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의 취업에서부터 직장생활 지도까지 교육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권 교육이 인간을 바르게 길러내는 교육으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이들 대안학교는 계속 늘어날 조짐이다.

환경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젊은 지식인들의 대안학교 운동은 그래서 계속 주목거리다.

고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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