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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가다] 폐허의 국경마을 주민 한명도 안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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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푸스테니크 (코소보) =배명복 특파원]12일 오전 10시20분 (이하 현지시간) .3백달러를 주고 구한 택시를 타고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를 떠나 코소보 국경을 넘었다.

아스팔트 포장의 2차선 국경길은 영국군 트럭과 장갑차가 꼬리를 물고 꾸역꾸역 코소보로 향하고 있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장갑차의 굉음은 상공을 나는 수십대의 헬리콥터 소음과 겹쳐 녹음이 우거진 산골짜기엔 온통 "우르릉 우르릉" 소리로 가득찼다.

영국군에 코소보 진입 '공동수호작전' 이 내려진 것은 이날 오전 5시25분. 즉시 정예부대인 제5공수부대가 선두에 섰다.

택시는 트럭과 장갑차 사이에 끼여 힘겹게 부대를 따랐다.

마케도니아 주둔 나토군사령부는 전날 각국 기자들에게 사령부 명의 프레스카드만 있으면 나토군의 코소보 진주 취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동수단은 제공하지 않았다.

군용차량을 타고 코소보 국경을 막 넘은 영국군 애드리언 프리어 부대장은 "이번 작전은 승리가 목표가 아니라 코소보를 평화로운 유럽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 이라고 말했다.

20여분 뒤 국경에서 5㎞ 떨어진 푸스테니크 마을에 도착했다.

2차선 도로 양쪽에 있는 가옥과 상점들 가운데 성한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자동소총을 들고 마을 입구를 지키던 영국군 니컬러스 (22)에게 "마을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 고 묻자 "한명도 없다" 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토군 선발대에 배치돼 하루전에 이곳에 왔다는 니컬러스는 혹시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지뢰탐지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푸스테니크에서 취재중 러시아군이 먼저 프리슈티나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군 공수부대가 헬기로 슬라티나 공항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3시. 그러나 이들을 맞은 것은 장갑차 40대를 앞세운 러시아군 2백여명. 러시아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영국군보다 몇시간 앞서 이곳에 도착했다.

양측은 다각적인 채널로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현재 양국군은 마치 적군처럼 팽팽히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은 11일 보스니아 주둔 병력을 차출, 베오그라드로 이동시켰다.

여기서 잠시 머무른 뒤 러시아군 기갑부대는 12일 새벽 '세르비아' 를 연호하는 수천명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프리슈티나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이날 저녁 러시아군의 이동보고가 들어오면서부터. 당초 러시아는 지휘권 일원화 여부 등 평화유지군 참여조건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진주 (進駐)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미국과 나토는 당황했다.

11일 오전 러시아와 협상을 벌인 뒤 브뤼셀로 돌아가던 탤벗 미 국무부 부장관은 즉각 비행기를 모스크바로 돌려 항의와 함께 다시 절충을 벌였다.

한때 미.러간엔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쌍방의 긴장은 미측이 러시아의 행동을 수용한다고 한발 물러서면서 누그러졌다.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12일 "러시아의 코소보내 진주를 수용한다" 고 말하고 더 나아가 코소보내 일부 지역을 러시아가 관할하는 것도 승인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게다가 조지 로버트슨 영국 국방장관은 "러시아가 단일화된 코소보 평화유지군 지휘체계를 받아들였다" 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탤벗 부장관은 "러시아와 아직 이견이 남아 있다" 고 말해 완전타결이 안된 상태다.

이날 푸스테니크에서는 중무장한 전차와 장갑차.공병용 불도저.교량용 중장비.통신차량.의무차량 등 갖가지 차량과 장비가 뒤섞인 긴 행렬이 M1 국도 (마케도니아 스코페~코소보 프리슈티나) 를 가다서다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 영국군은 행진 도중 곳곳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일부 주민들은 꽃다발 세례를 퍼붓거나 영국 군인들을 껴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영국군 휘하엔 네팔 등 각국에서 배속된 병력도 상당수. 이 때문에 군차량과 장비에 표시된 국적표시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나토의 십자성 표시와 '코소보평화유지군' 을 뜻하는 'KFOR' 이란 글씨는 공통이었다.

블라체 국경 근처에서 나토군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이브라힘 제카 (47) .코소보 서부 다코비차에 있던 집에서 쫓겨나 두달 전부터 가족과 함께 마케도니아 난민캠프에서 지내고 있다.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으냐" 는 질문에 "당장 내일이라도 가고 싶지만 고향집이 다 파괴된데다 그쪽 상황을 낙관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

4만여 유고군의 철수와 5만여명의 유엔 평화유지군 주둔이 완료됨으로써 기본적 안전이 확보된 뒤에야 순차적으로 귀환시킨다는 것이 난민캠프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 입장이다.

난민들이 느끼는 조급증을 달래기 위해 무질서하게 쏟아져 들어갈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을 홍보하는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등에 흩어져 있는 1백만명 가까운 코소보 난민들 가운데 오는 9월까지 40만명을 귀환시키고 올 겨울 전에 다 돌려보낸다는 것이 UNHCR측 계획이다.

이날 코소보 국경일대엔 미국 (동부). 독일 (남부). 프랑스 (남서부). 이탈리아 (북서부). 영국 (중앙) 등 각국 군대가 하루종일 굉음과 먼지를 내며 코소보로 진격했다.

이들이 과연 말 그대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 그러나 난민들의 표정에서나 세르비아계 입장을 감안할 때 전쟁은 끝났어도 코소보의 비극은 계속될 것같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벌써 유고군인 2명을 포함한 세르비아계 4명이 프리슈티나에서 코소보 해방군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고 세르비아 정보센터가 밝혔다.

푸스테니크 =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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