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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식 북핵 협상 효과 없어 … 큰 거 ‘한 방’으로 해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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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뉴욕 서튼플레이스 유엔 사무총장 관저에서 환담하고 있다. [뉴욕=조문규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21일 북핵 문제 해결 방식으로 ‘그랜드 바긴(일괄타결)’을 공식화했다. 이는 ‘살라미’ 식이라고 불렸던 기존의 협상방식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판단 때문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에서의 핵 동결 약속은 결국 깨졌고, 막대한 경수로 건설 비용과 중유만 소진했다”며 “2005년 9·19 합의의 핵 동결-불능화-핵 폐기 등 3단계 접근법도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행동 단계마다 보상이 주어지는 과거 방식은 북한이 판을 깨면 원점으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 등 관련국들은 북한에 주기만 하고 얻는 건 없는 낭패를 봤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기존의 협상이 ‘쉬운 것부터, 부담이 없는 것부터’ 하자는 것이었다면, 이 대통령의 제안은 ‘북한이 핵심적인 핵 프로그램을 돌이킬 수 없도록 포기하면 우리도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주겠다’는 원 샷 해법”이라고 설명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북핵 문제에 대한 이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던 ‘비핵·개방 3000’도 전략적인 수정의 길을 밟게 됐다. ‘북한이 핵 폐기 결단을 하면 대북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순차적 접근법을 제시했던 이 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에선 ‘북한이 핵 폐기 결심을 보여주면…’으로 다소 완화한 바 있다. 여기에 이어 이번엔 북한의 핵 폐기와 경제 지원, 안전 보장을 동시에 맞바꾸는 협상카드를 제시한 것이다.

이 같은 그랜드 바긴에 대해선 이미 지난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에 공감대가 싹텄다. 이 대통령이 당시 “잘못된 행동에 미온적으로 제재하고 보상을 되풀이하는 과거 방식에서 탈피해 실질적 핵 폐기와 보상을 연계한 ‘패키지 안’을 북한을 뺀 5개국이 마련하자”고 제안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 핵실험에 대한 국제적 제재가 강조됐던 상황이라 한·미 양국은 이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을 뺀 5개국이 물밑에서 ‘일괄 타결식 해법’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 왔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을 뺀 5자 사이엔 그랜드 바긴이란 용어와 협상방식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이뤄졌다”고 전했다. 당장 23일 뉴욕에서 열릴 한·중,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주된 의제로 거론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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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슷한 의미로 과거에 거론됐던 ‘패키지 딜’(또는 ‘포괄적 패키지’)과 그랜드 바긴의 차이점은 뭘까. 청와대 관계자는 “패키지 딜에는 북한에 종합선물 보따리를 준다는 일방적 혜택의 의미가 강한 반면, 그랜드 바긴은 ‘상호 주고받는’ 개념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랜드 바긴의 갈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아무리 일괄타결이라고 해도 구체적인 협상에 돌입하면 행동과 보상의 선후 문제를 따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과거 ‘단계별 협상 방식’의 부작용이 또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뉴욕=서승욱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살라미=얇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북한이 행동하면 그때마다 조금씩 보상해주는 단계별 협상 방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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