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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살아있는 중국현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시안 (西安) 은 중국 제1의 고도 (古都) 다.

1천1백년 동안 11왕조의 수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시대가 당 (唐) 나라 현종 (玄宗) 때다.

당시 시안은 인구 1백만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도시였다.

13세기에 중국을 다녀간 마르코 폴로는 시안을 '번창하는 교역 중심지' 라고 표현했다.

시안은 중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36년 발생한 시안사건은 비단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국민당 정부의 대원수 장제스 (蔣介石)가 부하인 장쉐량 (張學良)에 체포된 것이다.

장쉐량은 당시 동북군 (東北軍) 사령관으로 시안에 주둔하면서 같은 산시 (陝西) 성 옌안 (延安)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만주를 지배한 군벌 (軍閥) 장쭤린 (張作霖) 의 아들로 장쭤린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었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았다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산시성에 머물고 있었다.

장쉐량은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소탕한 후 일본과 싸운다는 장제스와 달리 모든 정치세력이 단결해 일본군을 만주에서 몰아내자는 일치항일 (一致抗日) 을 주장했다.

그해 12월 12일 장제스가 대공 (對共) 소탕작전을 독촉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하자 장쉐량 일당은 장제스를 전격 체포하고 내전 중지.일치항일.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제2차 국공합작 (國共合作) 이 성립됐다.

사건 발생 2주만인 25일 장제스는 석방돼 난징 (南京) 으로 돌아갔다.

장쉐량은 충성의 표시로 장제스를 수행해 난징에 갔다가 체포됐다.

장쉐량은 그후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49년 타이완 (臺灣) 으로 쫓겨가면서도 장쉐량을 데리고 갔으며, 계속 연금상태에 뒀다.

75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장징궈 (蔣經國)가 총통이 됐지만 장쉐량은 연금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장쉐량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94년 리덩후이 (李登輝) 현재 총통에 의해서였다.

장쉐량은 그후 하와이로 이주해 평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 1일 장쉐량은 99세 백수 (白壽) 생일을 맞았다.

중국과 타이완 정부는 서로 장쉐량을 모셔오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중국 현대사' 장쉐량이 20세기의 마지막 시점에 다시 한번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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