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리얼리즘 스크린 실험-신승수감독 신작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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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한동안 소홀히 했던 사회문제가 한국영화의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중견 신승수 (45) 감독의 신작 '얼굴' .기발한 소재주의 영화와 가벼운 멜로물 위주로 치닫던 한국영화 제작 풍토에 급제동을 거는 작은 '반란' 으로 받아들여져 신선하다.

'얼굴' 은 어느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정의파 김순경 (조재현) 과 얼치기 깡패 고형석 (임하룡) 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양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두 축이 가진 힘은 애초부터 '불균형' 이다. '민중의 지팡이' 라는 경찰, 즉 공권력의 정의 (正義) 는 이미 무너진 상태. 커피를 배달 온 다방 여종업원 미스서 (김화성)에게 "언제 한번 줄래" 라면서 농이나 지껄이는 게 공권력의 일상이다. 그런 무주공산의 힘의 공백을 김순경만이 끝까지 만회하려고 애쓴다.

그러다 그는 자살로 짧지만 굵은 청춘을 마친다. 반면 고형석의 세력은 한 동네를 철권 통치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다. 간호원과 여교사 등 미모의 여성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도 진실은 철저히 은폐된 채 '자살' 로 처리되고 만다.

그 뒤에는 배타성으로 똘똘 뭉친 현역의원 권중만 등 '이너 서클' 의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얼굴' 은 이런 이야기를 추리극 형식으로 풀어간다. 신선면에 부임한 신참형사 김순경이 간호원 조영선 (김주미) 의 사인을 추적해 가면서 드러나는 흑막의 그림자들이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서툰 블랙코미디나 과장된 연출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자제됐다.

고형석 역의 임하룡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이 영화의 정공법적인 접근이 특히 두드러진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가죽 점퍼를 걸친 모습은 영락없는 코미디 프로의 낯익은 캐릭터이지만, 진지함만은 넘치다 못해 오히려 딱딱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신감독의 시선은 높이 살만하다. 80년대 '장사의 꿈' '달빛 사냥꾼' 등에서 보여준 이른바 '사회적 리얼리즘' 을 오랜만에 심혈을 기울여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얼굴' 의 이런 순수성이 극적 구조 속에 용해돼 대중적 즐거움으로 승화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조재현과 임하룡을 상반된 캐릭터로 무장시켜 치열한 대립과 갈등으로 몰고가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선악에 대한 진솔한 물음이 다소 진부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는 5억여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됐다. 최소 10억원이 넘는 요즘 제작 풍토에서 이 또한 새로운 시도다. 보다 많은 예산을 들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졸작을 돈으로 과대 포장하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신선하다. 29일 개봉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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