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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패션의 제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이득제 옮김) - 질 리포베츠키 著

프랑스의 소장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의 '패션의 제국' 을 읽다가 시선을 붙드는 한 문장과 마주쳤다.

"우울하게 옷을 입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새로운 것의 엑스터시와 변화에 대한 열망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을 이 말은 경쾌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패션은 도처에서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이 되어가고 있다.

의복이나 장신구 가구같은 것만이 패션의 영토에 귀속된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광고.언론.예술 이 모든 분야.계급과 세대에 빠르게 패션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다.

이를 저자는 '패션의 폭발' 이라 부른다.

요즘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서구의 많은 나라가 그랬듯이 가파른 이데올로기의 터널을 가로질러 급격히 패션의 제국으로 이동해가고 있는 듯하다.

개성의 자유의 발현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소비상업주의의 확산으로 타기되기도 하는 이 현상을 놓고서 저널리즘과 학계는 그럴 듯한 설명을 내놓기에 바쁘다.

하지만 법과 질서와 규율을 강조하는 신보수주의의 도덕적 목소리도, 마르크시즘에 연원을 둔 비판이론의 분석도 '패션사회' 로 불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적 특성을 제대로 관통하지는 못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과연 이들이 탄식하는대로 패션의 범람은 무분별한 모방과 지적 퇴행, 그리고 시민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사이렌의 유혹' 인가.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패션을 허영이나 낭비, 차이짓기에 대한 갈망에서 연유한 부정적 현상으로 보는 상투적 관점에서 벗어나 저자는 민주제도와 의식의 자율성에 대해 패션이 지니는 긍정적인 힘에 주목한다.

패션은 합리성의 반명제가 아니다.

패션의 유혹은 이미 그 자체로 현대사회를 특징짓고 있는 계산.기술.정보의 합리적인 논리이다.

패션의 지배에 절망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새로운 연대성과 윤리를 만드는데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는 결국 세기말의 묵시록적 비관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를 경축하는 데 모아지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패션의 피상성과 경박성까지 옹호하고 이다.

어쩌면 현실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거대한 것, 영웅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신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패션으로 대표되는 작은 것, 현재적인 것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완된 서구 사회에 살고 있는 저자와 달리 아직도 IMF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패션이라는 이름의 복음은 무작정 경축될 수만은 없는 듯하다.

남진우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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