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공직사회와 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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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장관.도지사.국회의원은 집안에 돈을 쌓아 놓는데 왜 우리더러는 월급만 갖고 살라 합니까. " 최근 행정자치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공무원 비리가 생기는 이유' 라는 제목의 글 내용 중 일부다.

하위직 공무원들의 박봉에 대한 설움과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비판 내용을 담고 있어 게시 이후 삽시간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당황한 행자부가 이를 삭제해 버리자 누군가 복사해 돌리면서 괴문서처럼 공무원사회에서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은 소동을 보면서 지금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어떤 사정인지, 인터넷 또는 PC통신을 이용해 막힌 언로 (言路) 를 트는 새 방식이 어떠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피가 통하지 않으면 뇌기능이 정지하듯,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 조직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

특히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개혁.사정의 집중 표적대상이 공직사회였다.

여기에 구조조정까지 겹치니 공직사회 특히 하위직 공무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않고 복지부동에 눈동자만 굴리는 조직 분위기를 만들게 된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듯, 괴문서를 본 공무원들은 할 말을 속 시원히 대변해줬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의 한 홈페이지에는 '공무원 신 (新) 십계명' 이 나와 '먹을 수 있을 때 즉시 챙겨라' '주는 만큼만 일해라' 는 등 자조적 주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공직사회의 불만과 불평이 쌓여 있는데 비해 언로가 닫혀 있어 자신들의 주장과 불만을 수렴할 공적 루트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익명으로 자조적인 글을 싣고 때로는 막가파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밑의 실정을 모르고 개혁과 사정만 강요하니 밑의 의견과 주장이 갈 곳이 없어 익명의 새 언로방식을 취한다고 본다.

개혁원칙에만 몰두해 교사들을 개혁대상으로 몰아붙이니 힘 없고 말 못하는 교사 22만여명이 장관퇴진을 요구하는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는가.

교사사회와 교육당국간에 언로가 트여 있었던들 이런 집단서명을 하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부산경찰청의 한 간부가 천리안을 통해 게시한 '검찰은 자각해야' 라는 글은 게시자의 소속과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검찰의 파출소 감찰은 월권이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펴고 있지만, 이 역시 상부의 논의중지 지시로 언로가 막힌 경찰의 불만이 돌출형태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 새 각료명단이 발표된다.

고위 공직자들은 지금부터라도 하위직 공무원들의 의견과 주장을 듣는 귀를 열어야 한다.

개혁.사정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개혁의 손과 발이 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언로를 열고 그들의 의견과 주장을 수렴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게 새 내각이 해야 할 당면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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