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개혁의 성공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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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공동여당의 8인 정치개혁 특위가 마련한 선거제도 합의안이 하루만에 번복됐다.

구멍가게 경영에도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하물며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정치개혁이 원칙이나 계획도 없이 당리당략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당리당략을 무조건 억누르고 타율적인 개혁을 강제한다면 실패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익은 뒤로 감추고 명분만 내세우는 위선보다는 차라리 각 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이 타협점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계개편을 위해 정치개혁을 이용하려 한다는 야당의 의구심은 최소한 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정당의 이해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공공선 (公共善) 을 극대화하는 것이 개혁정치가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정치개혁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합의와 절차가 필요하다.

첫째, 기존 제도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가 제도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의 우선 순위에 대해 당사자들간 합의가 있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더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차선의 문제는 포기하는 결단도 필요하며, 이를 위해 장단기 개혁의 청사진이 필요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여당이 공천과정의 민주화나 정당제도의 개혁에 대한 언급 없이 선거제도만 논의하는 것은 개혁의 진의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단지 돈을 덜 쓰기 위해 여당이 중.대선거구제를 고려한다면 차라리 의원을 선출하지 않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다.

이는 개혁목표의 우선 순위가 정해지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다.

모든 정당은 정치개혁의 명분으로 지역주의 극복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된 것은 선거제도의 변경이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정당의 전국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는 할 수 있겠지만 '지역감정 완화' 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텃밭에 연연하는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연고주의가 인사나 분배정책을 좌우하고,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구시대 정치인을 낙선시키기 위한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이 법으로 금지되는 한, 어떠한 선거제도 아래서도 지역주의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지역주의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여당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소선구제가 많은 사표 (死票) 를 발생시키면서까지 다수대표에 충실한 제도라면, 비례대표제는 표의 왜곡 없이 새로운 정치세력을 포함해 소수집단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장점이 있다.

현재 여당이 추진하는 것과 같이 일본식 권역명부를 사용할 경우 위헌소지가 있는 상한선을 정하지 않고는 더욱 심한 지역정당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전국 정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독일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목표와 실천방안이 따로 노는 개혁안으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둘째, 순조로운 개혁을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현 제도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당사자에게 실감나게 보여줘야 한다.

이해당사자는 여야의 현직의원은 물론 각 정당, 국민 등 모두를 포함한다.

기존의 제도에 비해 새로운 제도가 가져올 득이 분명하지 않을 때 개혁은 명분을 가질 수 없다.

실제로 변경된 제도가 자신에게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무지나 대화 부족, 정보 빈곤 때문에 이해득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협상에 응하지 않아 실패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셋째, 개혁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더욱 공개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즉각적인 비판이나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발상의 전환에 따른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시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여당 수뇌부가 대안의 생산을 독점하는 한 참신한 개혁안은 등장할 수 없다.

가령 비례대표 권역을 나눌 때 전남과 경남, 전북과 경북을 한데 묶는 방안은 왜 고려대상에서 제외하고 2분의 1 혹은 3분의 2라는 상한선을 두어 굳이 위헌소지를 만드는가.

넷째, 모든 이해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시민대표가 배제된 채 현직의원들에게만 개혁을 맡겨두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중립적인 학자와 시민단체의 대표를 포함하는 정치개혁 특위가 구성돼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끝으로, 최종 개혁안은 모든 당사자에게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만족을 주어야 한다.

국민을 무시한 정치인끼리의 담합은 유권자의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위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여야 모두가 초발심으로 돌아가 자당의 이익을 많이 손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의 목적을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수립해 협상에 적극 임해야 할 것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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