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 서울 마포구 박병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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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교단에 선 게 지난 60년. 숙명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나는 정년퇴임을 한 지난 2월까지 40여년 동안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처음 학생들과 만나던 날, 어떻게 하면 빨리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 학생들을 '계집애' 하고 불렀더니 아이들은 재미있었던지 '계집애 선생님' 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교단에서 보낸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제자들을 받아 가르치고 또 떠나보냈다.

졸업 후 사회에 나가 각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제자들을 보면 대견했고 혹 어려운 일에 처해 힘들어 하는 제자들 소식이 들릴 때면 마음 한 곳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교단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난해 가을. 교무실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20여년 전 담임을 맡았던 제자가 보낸 편지 속엔 세월 저편에 아련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사연들이 가득했다.

지금은 사회인이 된 딸아이가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고3이던 제자에게 딸아이의 부족한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제자가 지닌 침착하고 따뜻한 품성을 딸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제자는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갑자기 아버지마저 여의게 돼 힘들어 하던 때였다.

제자는 내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때 받은 과외비로 대학 입학금을 낼 수 있었다며 20년 동안 간직해온 고마움을 전해왔다.

딸아이가 생각보다 공부를 잘해 내가 일부러 과외를 시킨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학생.동료교사들과 조촐하게 마련한 정년퇴임 행사에 찾아온 제자는 꽃 한 다발을 나에게 안겨줬다.

이젠 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가 된 제자. 너무 늦게 찾아뵌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울먹이는 제자를 보면서 곱고 예쁜 아이들과 함께 했던 나의 교직 생활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서울 마포구 박병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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