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성역' 많아 매듭 못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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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것 참…. "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W골프장의 高모 (59) 사장은 떨떠름했다.

정부가 '체육시설 설치에 관한 법률' 을 바꿔 골프장에 숙박시설 설치를 허용했지만 따져보니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도권 골프장 중 서울에서 거리가 먼 업소들은 숙박시설이 숙원이었다.

여러차례 건의도 했으나 정부는 계속 '불가' 였다.

그러다 규제완화 흐름을 타고 이달부터 70실 이하 5층 이하의 시설을 지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따라붙은 제한규정. 상수원에서 40㎞ 이내에 있는 골프장은 안된다.

폐수배출 기준도 강화됐다.

이 요건들을 지킬 수 있는 곳은 경기도내 1백2개 골프장 중 15개뿐이라는 게 도 관계자의 말이다.

그나마 투자가치를 따지면 숙박시설을 만들 곳이 거의 없다고 高사장은 주장한다.

환경보호가 성역 (聖域) 처럼 돼 규제완화가 핵심을 비켜가곤 하니 환경을 보호하되 기업활동도 돕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얘기다.

중첩규제되는 수도권은 또 다른 성역이다.

덴마크의 다국적 기업인 레고 그룹은 경기도 이천시 일대 6만㎡ (18만평)에 2억달러를 투자해 2002년까지 세계 각국 풍물을 레고 블록으로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수도권 정비계획법이 3만㎡ 이상의 관광지 조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 경기도의 잇따른 요청에 정부는 '3년간 한시조항' 을 두어 규제를 풀었다.

그러자 이번엔 레고 그룹이 주저하고 있다.

한국의 사업환경이 불투명한 데다 인허가 관련 규제가 많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것이다.

규제개혁에 사각 (死角) 과 성역이 너무 많다.

부처들이 실적에 매달리며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바람에 여러 부처나 법령이 관련돼 매듭 풀기가 어려운 핵심.덩어리 규제는 대부분 방치된다.

자유경쟁.효율성 제고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가 이익집단의 압력이나 여론 때문에 남겨지는 경우도 숱하다.

수도권 내 공장입지.농지취득.인력고용.노사문제.공정거래.은행소유지분제한.물가.환경 등과 관련된 규제가 그런 예다.

이중에는 수도권처럼 이런저런 규제가 중첩돼 손대기 부담스러운 분야도 있고, 30대 기업 지정제도처럼 일부러 개선을 외면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들 규제를 그냥 놔두고는 '고비용.저효율 구조' 로 요약되는 한국병을 치유하기 어렵다.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사각과 성역을 줄여나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기업들의 건의를 바탕으로 규제개혁 70대 핵심과제를 제시했으나 제시된 개선방안이 온전히 반영된 것은 17건 (24.3%) 뿐이다.

수도권 과밀억제 지역의 경우 기업이 시설자동화를 위해 공장증설을 추진하려 해도 증설면적이 3천㎡ (9백평) 이내로 묶여 노후시설 교체가 어려운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그뿐 아니다.

국제통화기금 (IMF) 출범 이후 6대 그룹 이외의 상당수 그룹들이 사실상 해체됐는데도 여전히 30대 그룹을 뭉뚱그려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신규채무 보증 등을 금지하는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 , 과다하고 자의적인 군사시설보호구역, 투기단속 위주의 부동산 정책, 시장원리를 외면하는 물가억제 정책 등도 하나같이 수술이 시급한 과제다.

기획취재팀 = 박의준.하지윤.왕희수.박장희.나현철.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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