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 파산 1년, 고통의 터널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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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20면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대표적 중산층 거주 도시인 월넛크릭에 사는 마이클 창은 석 달 전 투자 목적으로 집 한 채를 구입했다. 방 셋에 화장실 셋인 1900평방피트(약 176㎡) 주택의 매입 가격은 53만 달러. 2007년 부동산 버블의 절정 때 80만 달러를 오르내리던 집이다. 창은 이 집을 월 2500달러에 임대해 연 5.7%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연 1%선인 보유세를 빼도 수익은 4.7%로 은행 예금이자(현재 연 2.8%선)를 크게 웃돈다. 창은 “이 정도 가격 조건이면 장기 투자하는 데 아무 부담이 없다”며 “근처에 한 채를 더 사기 위해 매물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최근 부동산시장이 꿈틀거리면서 53만 달러에 샀던 집과 같은 집들이 59만 달러를 호가한다”고 전했다. 미국의 대표적 주택가격 지표인 케이스-실러지수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베이 지역의 주택가격은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올 6월 처음으로 반등해 전달보다 3.8%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절 연휴 마지막 날인 이달 7일 오후, 샌프란시스코의 쇼핑 중심지인 유니언 스퀘어는 휴일을 즐기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광장 정면에 위치한 메이시스 백화점은 연휴 쇼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10∼20%의 특별 세일 안내문을 곳곳에 붙여 놓고 있었다. 1층 잡화 매장에 들어가 보니 연휴답지 않게 한적한 분위기였다. 한 매장 직원에게 “오늘 장사가 어떠냐”고 묻자 “기대에 못 미친다. 그나마 구경만 할 뿐 실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추락했던 매출 감소세가 최근 몇 달 새 멈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되살아날 조짐을 찾아보긴 아직 힘들다”고 덧붙였다.

15일은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그 1년 동안 세계 금융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인들의 일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실직자가 계속 늘고 있는 게 가장 큰 고통이다. 8월 실업률은 9.7%에 달해 두 자릿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세계 경제를 호령하던 자신감도 크게 상처받았다. 그 자리를 중국과 유럽연합(EU)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오랜 먹구름 끝에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을 중심으로 모처럼 햇살이 얼굴을 드러냈지만, 고용과 소비 전반에는 여전히 냉기가 감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100년 만에 나올 위기”라고 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고통의 터널은 좀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월 일자리를 잃은 인쇄공 도널드 머니(43)는 실업보험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금보다 내년이 더 걱정”이라며 “올해 말이면 실업보험 혜택이 끝나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자신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머니처럼 이달 말이면 실업보험금이 끊기는 실업자가 40만 명, 올 연말까지는 130만 명에 달하게 된다. 늘어나는 실업 때문에 겨우 하락세를 멈춘 소비가 연말이 지나면서 다시 가라앉을 것이란 우려도 크다.

상업용 부동산 시장도 경기회복을 가로막을 복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 대출의 연체율은 4%선. 전문가들은 연체율이 5%선을 넘으면 은행들의 자본금을 까먹기 시작할 것으로 본다. 이는 새로운 신용경색을 초래할 수도 있다. 상업용 부동산 대출 잔액은 8140억 달러 규모로 올 하반기부터 2011년까지 만기가 집중돼 있다.

이런 불길한 지표들이 여전하지만 1년 전에 비하면 낙관론이 크게 늘었다. 낙관론은 애널리스트를 중심으로 주로 시장 쪽이 많다. 캘리포니아 생메리대학의 앤디 윌리엄스 (경제학) 교수는 “지난 1년을 되돌아볼 때 경제가 예상보다 빨리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경제가 본격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2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경제도 조심스럽지만 병상에서 일어나 거동을 준비 중이다. 세계 주요국 증시는 한 발짝 먼저 움직였다. 11일 현재 시가총액이 1년 전에 비해 90% 수준까지 회복했다.
‘1929년의 대공황보다 깊고 암울할 것’이란 경고를 무색하게 할 만큼 세계 경제가 버텨준 것은 각국 정부들의 정책 공조 덕이 컸다. 세계 중앙은행들은 일제히 돈을 풀었으며 대공황 때와 달리 혼자 살겠다고 무역 빗장을 걸어 잠그는 일도 적었다. 한국은 특히 기민하게 움직였다. 외환위기 학습효과로 정부는 물론 가계·기업, 경제 주체들의 대응도 의연했다. 한국 경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가장 먼저 회복세를 보인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물론 세계 경제가 긴 터널을 빠져 나왔다고 낙관하기엔 이르다. 과도하게 풀린 돈을 어떻게, 얼마나 잘 회수할지도 과제다. 대표적 비관론자인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경제학) 교수는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이 괜찮다는 기대에 차 있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지진 않을지 몰라도 앞으로 2∼3년은 잘해야 울퉁불통한 길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1년이 지났지만 세계 금융위기의 그림자는 여전히 세계인의 발밑에 드리워져 있다. 길이는 좀 줄었을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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