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새 창작집 겹경사…소설가 박상륭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열렬한 소수 비교도 (秘敎徒) 들에게만 전해지던 소문 속 경전 (經典) 을 만나러 가는 길 같았다.

30년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작년 여름 귀국, 광화문에 살림집을 마련한 소설가 박상륭 (59) 씨. 생존작가로는 보기드물게 23.24일 예술의전당에서 '박상륭문학제' 가 열리고, 새 창작집 '평심' (문학동네.7천5백원) 과 첫산문집 '산해기' (문학동네.6천8백원)가 나란히 출간된다.

서라벌예대를 졸업 (소설가 이문구씨와 동기) 하고 63년 '아겔다마' 로 '사상계'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 그는 75년 장편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지성사) 와 94년 완간된 장편 '칠조어론' (문학과지성사) 으로 한국문학에 전무후무한 형이상학적 구원의 세계를 쌓아올렸다.

이 작품세계를 풍설로만 전해들은 독자가 대부분인 것은 작가가 69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버린 탓만은 아니다.

불교와 기독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경전과 드라마, 온갖 비속어와 욕정의 잡설 (雜說) 이 생사의 예언 (豫言) 과 공존하는 그의 소설을 단숨에 읽는다는 것은 마라톤코스를 1시간 안에 주파하겠다는 욕심처럼 불가능하다.

바슐라르의 철학서와 '죽음의 한 연구' 를 1, 2백쪽씩 번갈아 1주일간 정독했다는 것이 " '무정' 이후 가장 좋은 소설" 이라고 평한 고 (故) 김현의 독법이다.

"직접 보니, 그저 늙은탱이지요?" 두 내외의 거실은 도심답지않게 고즈넉했다.

밴쿠버에서 15년전 처음 문열었던 서점 이름이 'reader' s retreat' .일찍부터 은자적인 독서로 양식을 삼아온 그는 '난해한 책' 에 대한 기자의 불평에 "누구든 한번쯤 홍역치르듯, 그저 쓴 약먹듯 한번은 삼켜야 하는 것" 이라고만 답한다.

서울에서 떠날 때 이희승국어사전.성경.한글 팔만대장경을 들고갔다는 그는 지금도 원고지를 쓴다.

한번 쓰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여덟 아홉차례 육필로 다시 쓴다.

"그렇게 쓰다보면 옛날에 먹어두었던 말들이 살아나지요. " 모국어와 단절된 세계에서 그는 "사는 방법으로 문학을 했다" 고 말한다.

"저는 이제까지 한 권의 책을 써온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죽음에 맞선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 한 가지 주제지요. " 그의 문학적 경전은 이제 본격적인 독해 (讀解) 앞에 펼쳐졌다.

문학제 발제를 맡은 평론가 김정란교수 (상지대) 는 "그는 너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독했다" 고 평한다.

그 강렬한 고독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쩌면 문학 바깥에 더 많았던 터. '박상륭문학제' 가 박상륭작품을 원전삼은 박호빈의 무용.임도완의 마임.양윤호의 영화를 선보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숱한 쉼표가 책읽기 속도를 제한하는 창작집 '평심 (平心)' 은 박상륭문학의 난해함에 압도되었던 독자들에게 요긴한 입구 (入口) 다.

그 문 안쪽에는 물질주의 축생도 (畜生道) 로 떨어진 당대 인간 삶, 다시말해 '몸의 우주' 에서 '마음의 우주' 로 가려는 작가의 길이 이어진다.

문학제며 창작집이며 "젊은 날같은 박력은 없고 대가연 (大家然) 하는 '폼생폼사' 뿐" 이라고, 그는 못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