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 1조원 돌파 ‘사상 최고’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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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최근 임금 체불 문제로 황산 테러를 당한 한 중소기업 여직원의 사연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월급을 받지 못해 사실상 실업상태인 근로자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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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체불에 항의하며 고공시위 중인 근로자들.

밀린 월급 달라는 것이 황산을 뒤집어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어떤 중소기업 사장이 체불된 임금을 달라며 소송을 한 20대 여직원 얼굴에 황산을 뿌리라고 시켰다. 여직원의 얼굴은 무너졌다. 사건이 발생하고 석 달 정도 지난 최근 모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피해 여직원의 사연이 방영됐다.

황산테러 사건 계기로 본 임금체불 실태 #“근로복지공단 ‘임금체불 생계비 대출자’ 2만 명 넘어”

경찰 조사 결과 이 회사는 임금 체불이 잦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3월 말에는 임금 체불에 항의하던 건설 일용직 노동자가 시공업체 소장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 8월에는 50대 남성이 밀린 넉 달 치 임금을 달라며 아파트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였다. 지난 2일에는 같은 이유로 항의하던 건설 하청업체 직원들이 시행사를 찾아가 화염병을 던지다 경찰에 구속됐다.

고용유지지원금도 12배 증가

지난 8월 소비 심리가 7년 만에 최고치를 찍을 만큼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퍼지고 있지만,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에겐 이해할 수 없는 ‘심리’다. 임금 체불,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노동부 자료를 보면 지난 8월 말 현재 체불 임금은 8350억원이다. 피해 근로자는 20만 명에 육박한다.

7~8월 사이 체불된 임금이 800억원, 피해 근로자는 2만 명 늘어난 추세를 보면 10월 중에 지난해 체불 임금 총액을 넘어 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전체 체불 임금은 9560억원이었다. 1조원이면 월 300만원 받는 근로자 6만6000명의 통장에 다섯 달째 월급이 들어오지 않은 숫자다.

지역별 편차는 있지만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지난해보다 50%나 늘었다. 올 8월 말 현재 대구지방노동청이 관리하는 대구·경북지역에서 발생한 임금 체불 피해 근로자는 1만5000여 명. 이 중 3분의 1이 아직까지 구제 받지 못했다. 부산지역에도 임금 체불 근로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적으로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해도 많이 늘었다. 지난해 8월 말까지 체불 금액은 5900억원(사업장 수 6만7000여 개, 피해 근로자 15만5000명)이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통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올 상반기 민·가사 사건 법률구조 실적 통계에 따르면 10건 중 7건이 체불 피해 관련이었다.

1~6월 사이 임금이나 퇴직금을 받지 못해 공단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만 7만5000여 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 정도 늘었다. 또한, 국민권익위원회가 올 1~3월 중 국민신문고를 통해 처리된 15만 건의 온라인 민원을 분석한 결과 임금 체불 지급과 관련된 민원이 전체 민원 중 가장 많았다.

이와 관련해 노동부 관계자는 “질적으로 근 10년 사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체불 임금액이 1조원을 넘어선 것은 그간에도 많았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조2000억원에 달했던 체불 임금은 2002년 3000억원대까지 줄었다가 2004년 1조원을 넘어섰다.

장기 불황의 결과기도 했지만 조사 대상을 5인 이상 사업장에서 1인 이상 전 사업장으로 확대한 것이 이유였다. 이후 3년 연속 체불 임금은 1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2008년 8000억원대로 떨어졌다가 올해 다시 늘고 있다.

문제는 지난해 말과 올해 정부와 금융기관이 중소기업 자금 지원을 크게 늘렸는데도 월급을 주지 못하는 기업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정부의 긴급 자금 지원이 없었더라면 올해 사상 최대의 임금 체불을 기록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영세 사업장에서 자주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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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정부가 올 3분기에도 재정지출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출구전략에 따라 중소기업 지원을 철회해야 할 시기를 논의하고 있는 상태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할 만큼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실업급여나 정부에서 체당금을 받아야 하는 근로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실제로 문을 닫은 기업 근로자에게 정부가 지급하는 체당금은 올해 대폭 증가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월 평균 100억~130억원이던 체당금 지급액은 지난해 말부터 급증해 지난 6월 한 달 동안만 304억원이 지급됐다. 올 상반기 누적 체당금은 1450억원. 지난해 전체 지급액은 1880억원이었다.

통상 도산신고 후 법적 절차를 걸쳐 3~4개월 후에 지급되는 것을 감안하면, 올해 체당금 지급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될 전망이다. 근로자를 해고하는 대신 휴업이나 휴직으로 고용을 유지할 경우 정부가 사업주를 대신해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고용유지지원금도 눈덩이처럼 늘었다.

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올 8월까지 고용유지지원금 2570억원이 집행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배 늘어났다. 고용유지지원금은 지난 1월 100억원에 못 미쳤지만 지난 4월 450억원으로 늘었고, 이후 매월 200억~300억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기간은 최장 6개월이다. 올 3~4월 지원 받기 시작한 기업의 경우 곧 일몰이 다가온다. 실물경기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 기업은 또다시 구조조정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상당수 기업이 임금을 주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임금 체불로 생계에 곤란을 겪는 근로자를 위해 시행하고 있는 ‘임금 체불자 생계비 대출’에 도움을 청한 근로자는 이미 2만 명을 넘어섰다. 이 제도는 소속 사업장에서 1년 이내에 1개월 이상 임금이 체불된 재직근로자를 대상으로 연 2.5% 이자에 최고 700만원까지 대출해 준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임금을 받지 못해 생계비 대출 신청을 한 근로자는 8월 말 현재 2만 명, 금액으로는 1120억원이다. 이 중 1만5000여 명이 대출을 받았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1인당 평균 500만원 정도를 빌려 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임금 체불은 영세 사업장에서 자주 발생한다.

지난해의 경우 직원에게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한 사업장 100곳 중 85곳이 30인 이하 사업장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작년 임금 체불로 피해를 본 근로자 25만여 명 중 노동부의 지도해결이나 사법처리를 통해 구제 받은 근로자는 60%에 그쳤다. 올 8월 말 현재 노동부가 집계한 체불 임금 피해 근로자 중 6만여 명이 구제 받지 못하고 있다.

김태윤 기자·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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