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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대학경쟁력 학부개혁서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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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가경쟁력은 대학의 경쟁력에서 나온다고 쓴 적이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대학경쟁력의 원천이 대학의 학부제에서 비롯된다고 하면 이의를 달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진정한 아들.딸들은 학부 졸업생들이다.

일반 및 전문대학원 졸업생들은 모금운동 때를 제외하고는 '사촌'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학부는 곧 문리과대학이다.

그 학장은 총장 다음의 제2인자며 대학원장들도 서열상 그 아래다.

교수 월례회의실도 상아탑의 센터인 문리과대학에 있다.

특정 전공과목보다는 지적 (知的) 으로, 사회적으로 성숙된 지도자로서의 기본그릇을 가다듬어주는 곳이 다름아닌 학부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humanities' 는 '인성 (人性) 의 체계적 연구' 라는 뜻에서 보통 인문대학으로 불리지만 실제 순수과학 및 사회과학과의 경계는 모호하다.

현실적으로 이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학부를 지칭할 때가 많다.

지난해 서울대를 다녀간 하버드대의 닐 루딘스틴 총장의 연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성의 탐구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본성을 모르고는 완전할 수 없다.

철학과 윤리에서 수학적 추리로, 자연과학에서 문학으로, 역사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로 넘나들어야 한다. 과학자에게 예술을, 예술가에게 과학을 이해토록 기본소양을 길러주는 인간학습 (humane learning) 이 학부교육의 요체" 라고 그는 강조했다.

따라서 대학 학부에서 전공은 별 의미가 없고 학과별 칸막이도 없다.

복수전공이 예사고, 학제 (學際) 간 다양한 공부를 한 학생일수록 대학원입학때 유리하다.

학부때 폭넓게 바탕을 쌓고 이를 토대로 전공을 정하고, 대학원에 가 '대기만성 (大器晩成)' 의 승부를 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대학진학때 '과학벌레' 들만 우글거려 따분하다며 매사추세츠공대 (MIT) 를 마다하고 하버드를 택한 일화는 유명하다.

'과학은 쉽다. 휴매니티는 어렵다' 는 경구가 제2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명문 메디컬스쿨의 의사지망생들을 짓누르는 요즘이다.

의술 (醫術)에서 인간의 얼굴은 갈수록 중시된다.

학부교육, 특히 인문학연구는 당장의, 또 손에 잡히는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남의 나라 언어와 문학.역사.철학.문화 등의 연구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만 이들을 앎으로써 우리의 것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문제를 생각하고 접근하는 방법, 역사적 안목과 국제적 차원, 그리고 자기발전의 동인 (動因) 과 창의성은 여기서 싹이 자란다.

학문도, 인생도 마라톤 경주다.

레이저광선과 실리콘 칩, 초전도체와 광섬유 등 세기적 발명들은 당장의,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순수기초과학의 연구과정에서 고안됐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더구나 21세기는 인간자본의 세기요, 정보와 아이디어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는 뇌본가 (腦本家) 시대라 하지 않는가.

우리 대학들의 병은 이미 깊어진 지 오래다.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감에서 한 두해 들떠 지내다 고시다, 입사시험이다 해서 상아탑이 금세 학관으로 변하고, 공대생들이 고시를 준비하는 판이다.

그 잘못은 학생들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대학의 시스템에 있다.

학과별 칸막이 속의 그 알량한 전공보다는 '롱런' 을 위한 바탕과 기초체력부터 다져야 한다.

그러려면 칸막이부터 없애 학문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전문직업인을 양성하는 법학.의학.경영부문 등은 선진대학들처럼 전문대학원체제로 개편해 나가야 한다.

세칭 인기학과로 몰려 인문학과들은 고사되고 만다는 우려들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미국 명문대학들도 어떤 강좌는 수강생이 3백~4백명 넘게 몰려 대강당에서 마이크로 강의하고, 강좌에 따라 수강생이 10명도 안되는 경우도 흔하다.

인문학의 한 우물파기는 어차피 대학원이 본령이다.

학부교육에서는 학과별 이기주의를 떠나 '인간학습' 에 걸맞은 강좌로 전체 학부생들의 시야와 바탕을 넓혀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

신입생도 학과별로 모집하지 말고 총정원 베이스로 뽑은 다음 학생들이 적성에 따라 학과를 선택토록 함이 더 합리적이다.

인문계열학과가 비인기학과로 외면당하는 것은 학풍부재 (不在) 와 학과의 지나친 세분화, 교수들의 영토의식 등 인문학과들 스스로에 더 큰 이유가 있다.

대학의 경쟁력은 입학때의 성적이 아니라 졸업때의 성취에 좌우된다.

우수한 두뇌를 뽑아다 4년뒤 '바보' 로 내보내는 '학관교육' 아래서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

경쟁도입과 시장원리에 따른 대학의 구조개혁은 사실 기업구조조정보다 더 절박하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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