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안양시 기획실장 이승엽씨 주차관리원으로 새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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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8일 오전 9시 지하철 과천선 인덕원역 환승주차장. 초로 (初老) 의 주차관리원이 밀려드는 차량을 정리하랴, 주차요금 받으랴 쉴새없이 뛰고 있다.

이승엽 (李承燁.62) 씨의 복장과 표정에서 지난해까지 안양시 기획실장이라는 고위직을 맡았던 사람이라는 냄새는 나지 않는다.

"체면이요? 그거 허무한 거요.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지…" 그는 지난해 3월 공무원 사회에도 몰아친 구조조정 태풍으로 정년을 10여개월 남겨놓고 퇴직하고 지난 2월 이 주차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13시간을 자동차와 씨름을 하고 있다.

월급은 1백만원. 일과가 끝나면 몸은 파김치가 되지만 퇴직 후에도 계속 일을 한다는 보람으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부인 (58) 과 안양시청 공무원으로 근무중인 두 아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언제 이 애비가 체면 따지는 것 봤느냐" 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李씨는 "젊은 시절에 고생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인 李씨는 1.4후퇴 때 어머니 (작고) 와 함께 월남했다.

천신만고끝에 대학을 진학했으나 학비 때문에 중퇴하고 62년 공무원을 시작했다.

73년 안양시에 근무하게된 李씨는 기획.업무추진력 등을 인정받아 총무과장.시정과장.기획담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36년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그의 손에 남은 건 안양시관양동에 있는 12평짜리 연립주택이 전부. 李씨의 '새출발' 은 실직자가 된 뒤에도 힘든 일을 마다하며 눈높이를 낮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정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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