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빛바랜 두편의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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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름 석자를 내걸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신문기자라는 직업에선 영광에 속한다.

영광만큼 고통이 따른다.

남을 비판할 때, 특히 정부나 정권책임자를 비판할 때 오는 부담감은 크다.

비판의 공정성.형평성을 생각해야 하고 사실 확인에 철저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어렵다.

보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정치적 상황과 연결돼 개인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권위주의 정권시절을 살아온 나같은 좀팽이 언론인에게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는 게 글쓰기의 더 큰 고통이다.

이런 고통을 극복하면서 그래도 뭔가 할 말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10년째

이 칼럼을 써오고 있지만, 능력.자질.용기 부족으로 글쓰는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어렵사리 써놓고도 신문에 발표하지 못한 때도 더러 있다.

내 칼럼 스크랩에는 두 편의 미발표 글이 있다.

'대도무문 (大道無門)' 과 '김이사의 사퇴' 라는 제목의 글이 빛바랜 종이로 남아 있다.

두 편 모두 YS정권 시절 쓴 글이다.

큰 길을 바르게 걷겠다는 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의 상표가 '대도무문' 이다.

그런 대통령이 어째서 자신의 대선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5.18정국을 급조해 역사단죄의 죄인마저 골목길 선언을 하는 진풍경을 낳게 했는가를 힐난하는 글이었다.

역사적 심판은 단호해야지만 처벌은 법의 이성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이사의 사퇴' 는 96년 문화방송 사장 선임권을 지닌 방송문화진흥회의 한 이사가 사퇴한 경위를 적은 내용이다.

그해 3월 임기가 끝나는 문화방송 사장직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방송사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식해 청와대쪽에서 현직 사장의 연임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 쫙 깔려 있을 때였다.

방송노조는 연임의 경우 파업을 경고했다.

사장 선임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소문의 방향대로 가고 있었다.

2차 투표날 두명의 金이사는 문화방송 파국을 눈앞에 보면서 사장 연임을 위한 투표를 할 수 없다고 퇴장해버렸다.

투표 결과는 소문대로 한표의 오차 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문화방송의 장기파업은 시작됐다.

문민정부의 방송.언론정책이 이럴 수 있는가를 묻는 글이었다.

대통령 스스로 지시를 내려 방송사 사장 선임에 개입하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쓰는 언론인의 자리를 바꾸게하는 짓을 결코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윗분의 뜻을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밑에서 용의주도하게 알아서 처리하는 결과 언론 스스로 통제하게끔 언론을 길들이는 것이다.

이런 글은 싣고 저런 글은 싣지 못하게 하는 군사정권 시절의 언론검열이 아니라 언론 스스로 통제하게끔 유.무형 압박을 요로에 가하는 행태였다고 생각한다.

엊그제 金전대통령이 성묘길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론자유다. 독재 시절 23일간 단식할 때 6개항의 요구사항 중 첫째가 언론자유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 인권이 공공연하게 탄압되고 있다.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전화가 도청돼 전화로 얘기할 자유가 없다. 이것이 김대중 (金大中) 정권, 즉 독재자가 하는 일이다. " DJ정부의 언론.인권.고문.도청의 실상을 YS 시절과 대비할 명백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적어도 YS가 DJ를 겨냥해 인권과 언론자유를 내걸고 독재자로 몬다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지난 한해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라는 국난을 겪으면서 대통령은 1년

간 언론의 협조를 요구한 적이 있다.

또 취임 1년간은 봐준다는 언론계 관행 탓으로 정부 비판을 자제해온 게 일반적 추세다.

그럼에도 비판의 날을 감추지 않은 언론과 논객도 있었다.

'문민독재' 라는 말이 돌 정도의 당시 언론상황과 비교하면 아직은 양호한 형편이랄까. 그러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권쪽에서 누구를 방송사 사장으로 밀고 누구를 현직에서 바꿨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여기에 장차 국정홍보처가 신설되고 총선을 앞둔 시점에 다가서면 어떤 형태로 언론을 통제하려 들지 예측하기 어렵다.

권력을 잡았을 때는 방송사 사장 선임에도 개입하고 갖은 외압을 넣다가도 권력을 놓고 세불리하면 언론자유를 외쳐서는 어린이 교육에도 정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언론자유란 쟁취하는 것이지 공으로 받는 게 아니다.

교묘한 외압을 통해 언론의 힘을 빼온 문민정부 이래의 언론 통제수법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YS정권을 반면교사 (反面敎師) 로 삼아 언론인의 글이 빛 바랜 종이로 남지 않도록 DJ정권도 깊이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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