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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19) 멋진 남자 신성일

나의 첫 사극인 '망부석' (63년) 은 원래 방송드라마였다.

당시 방송작가로 최고봉이었던 이서구씨가 극본을 썼다.

그래선지 청취자의 반응도 괜찮았다.

이 방송극의 히트가 영화 '망부석' 을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다.

방송드라마의 인기를 영화로까지 연결해 보자는 제작자의 속셈이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나는 이 작품을 찍으면서 정신적인 안위 (安慰) 을 느끼곤 했다.

나는 현세보다는 지난 세월, 과거속으로 되돌아 가는 게 늘 즐거웠다.

내 스스로 만족하는 작업이었던만큼 결과도 좋은 편이어서 아마 흥행이 잘 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성과 때문인지 주문이 밀려 이듬해 나는 무려 6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 '단장록' '10년 세도' '영화 (榮和) 마마' 세편이 사극이었다.

사극에 폭 빠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이처럼 쉽게 사극에 매료된 데는 가정교육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사극의 미덕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왔다.

일찍이 가정사를 외면한 아버지 때문에 나는 부정 (父情) 을 모르고 자랐다.

7남매중 장남이었지만 난 그 노릇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니 나에게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적인 버팀목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통해 엄격했던 외가 (外家) 의 유교적 전통이 고스란히 나에게 유전됐다.

그래서 유교의 기품과 예의범절은 나에겐 익숙했고, 상스런 현세보다 과거의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난 윤리 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이즈음 나는 당대 최고 스타로 발돋움하던 신성일과도 조우 (遭遇) 했다.

액션영화 '욕망의 결산' (64년) 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이때의 인연으로 신성일과는 '길소뜸' (85년) 까지 꾸준히 함께 일을 했다.

그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60년대 작품으로는 '나는 왕이다' '요화 장희빈' 등을 꼽을 만하다.

당시 배우의 캐스팅은 제작자의 고유권한처럼 돼 있었다.

김승호.신성일.신영균.문희.남정임.김지미 등이 이때 톱스타로 활동했다.

제작자들은 흥행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들을 꼭 기용했다.

지금은 많이 약화됐지만 당시 지방업자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작품을 담보로 한 제작비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지방 극장주들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들은 안정된 장사를 위해 스타들의 기용을 요구했다.

이러다보니 인기있는 몇몇 배우들의 경우 겹치기 출연은 불보듯 뻔한 일. 속된 말로 '개판'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질서가 없었다.

하루에도 이쪽 촬영장에서 저쪽 촬영장으로 이동하기 바빴으니, 배우들의 고통 또한 오죽했으랴. 아무튼 당시 만난 신성일은 연기의 문제를 벗어나 사람 됨됨이가 참으로 훌륭한 연기자였다.

연기의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어서 액션이건 멜로건 구애받지 않았다.

외형이 주는 체취가 어디든지 어울리는 배우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배우가 몇이나 될까' , 할 때가 많다.

'욕망의 결산' 엔 신성일외에 김혜정.이대엽이 출연했다.

범아영화사가 제작사였는데 신성일은 비록 건달이지만 의협심이 강한 청년으로 나온다.

그가 애인과 장차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로 약속하고 밀수배의 물건를 가로챘다가 그들에게 무자비한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었다.

지금도 평자들은 이 작품을 내 첫번째 본격 액션영화로 치곤 한다.

그들은 흔히 저예산 소규모의 'B급영화' 범주에 이 작품을 넣지만, 나는 이런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당시 내가 액션영화를 찍은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내 사생활이 '액션적' 이지 못해 영상으로 대리만족 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짓눌려 살아온 내 정신세계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그게 그래도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니, 지금 회상해 보면 거듭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때의 영화에 얽힌 일화 하나. 얼마전 TV를 보는데 60년대 액션영화가 나왔다.

치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다 보왔다.

나중 자막이 흘러 나오는 데 거기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내 작품인줄도 모를 정도로 막 찍던 그 시절의 흔적이었다.

그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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