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공습 소외 '유엔파워' 추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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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엔은 이제 무용지물인가.

1945년 창설 이후 50여년간 각종 분쟁에서 국제경찰 노릇을 해왔던 유엔이 무력감에 빠져 있다.

나토의 유고공습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50년 6.25 참전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거의 모든 국제분쟁은 형식적이라도 안보리 의결을 거쳐 유엔의 이름아래 이뤄졌다.

91년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의 이라크 공격도 안보리 결의를 거쳤다.

하지만 유고폭격은 완전히 딴판이다.

미국.영국.프랑스는 "나토 자체 결정만으로도 얼마든지 군사행동을 할 수 있다" 는 입장. 피터 불리 미 대리대사는 25일 안보리에서 유엔헌장의 '지역평화.안보를 지역안보기구가 맡을 수 있다' (제8장) 와 '지역평화.안보를 위해 무력을 쓸 수 있다' (제7장) 는 규정을 들며 이같은 주장을 폈다.

다른 나토국가들도 '코소보 사태가 지역 평화.안보를 위협할 경우 유엔헌장 제7장을 적용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는 기존 유엔안보리 결의안 1199호와 1203호의 모호한 규정을 내세우며 미국을 지지했다.

거부권을 가진 미국.영국.프랑스의 이같은 주장에 유엔은 유고사태에 아무런 개입도 못하고 있다.

유고공습 시작 이후 유엔이 한 일이라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24일 "유엔헌장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국제정치상 당연히 이뤄졌던 안보리 결의도 없이 공습이 이뤄진 것은 유감" 이라며 불만을 터뜨린 것과 25일 러시아가 공습중단과 협상재개를 주장한 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했다가 26일 부결된 것 뿐이다.

이런 상황속에 러시아는 "나토가 유엔 결의없이 폭격에 나선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조정 역할을 맡아온 유엔을 무력화하려는 의도" 라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유엔대사는 "이는 사태해결은 물론 '다극 (多極) 체제의 국제관계 안정' 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 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나토의 이름을 빌려 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미.영.프.러.중) 이 균형과 견제아래 세계 평화문제를 이끌어오던 지난 50여년간의 국제정치 구도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라브로프 대사는 또 "최근 체코.폴란드.헝가리를 새로 가입시키며 동진 (東進) 정책을 펴온 나토는 평화를 위한 유럽안보 협력에만 주력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고 지적하고 "하지만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새로운 세계경찰 행세를 하려 한다" 고 주장했다.

안보리 의장국인 중국도 탕자쉬안 (唐家琁) 외교부장을 통해 유엔의 위상회복을 요구했다.

유엔을 고리로 미국의 발목을 잡으려는 러시아.중국과 이를 뿌리치려는 미국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유엔은 몸살을 앓고 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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