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침범 괴선박에 첫 발포…일본 군비강화 '빌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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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북한 공작선으로 추정되는 괴선박 2척의 출현은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잠잠해져 가던 일본 열도를 다시 들끓게 했다.

일본 정부는 전후 처음으로 해상자위대의 '해상경비행동' 을 발령했다.

이에 근거해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들이 발포한 것은 54년 자위대 창설 이후 처음이다.

주변국 긴급사태를 상정한 미.일 방위협력지침 (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의 국회 심의가 한창일 때 벌어진 괴선박 사건은 일본에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려준 격' 이 됐다.

아울러 주변국에선 이번 일본의 민감한 대응이 자칫 군비확장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일본 대응 = 괴선박 출현 직후부터 일본은 전례없이 신속하고 신중한 대응에 나섰다.

방위 관계장관 회의와 안전보장회의, 긴급 각의 (閣議) 등을 잇따라 소집했다.

나포작전에는 P - 3C 대잠초계기와 대형 호위함 3척, 해상보안청의 항공기 2대와 순시정 9척 등 대규모 병력이 투입됐고 포사격과 폭탄투하까지 이뤄졌다.

추격작전이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북한 위협' 카드를 한껏 이용하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반면 실제 추격전은 신중하게 진행됐다.

선박에 어구 (漁具)가 없고 여러 개의 안테나가 달려 있는 데다 속도가 빨라 북한의 특수공작선으로 추정되는 데도 일본은 선체사격 대신 위협사격으로 일관했다.

도쿄 (東京) 외교가는 괴선박을 실제로 나포하거나 격침시켰을 경우 일본의 부담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방위청장관은 "북한 전투기들이 발진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추격은 상대국 (북한) 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며 작전포기를 명령했다.

일본은 대신 선박이 북한 영해로 진입한 사실이 확인된 뒤 외교채널을 통해 선박과 승무원 인도를 요청했다.

강력한 대북 (對北) 경고이자 "나포에 실패했다" 는 비난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 파장 = 이번 사건은 해빙조짐을 보이던 북.일 관계를 냉각시킬 것으로 보인다.

노나카 히로무 (野中廣務) 관방장관은 "국적 불명의 괴선박" 이라고 표현했지만 대북 강경조치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괴선박 출현을 계기로 일본의 안보강화 논의는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지난해 8월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일본은 전역미사일방위 (TMD) 계획 참가, 정찰위성 도입 등 '하드웨어' 정비에 힘을 쏟았지만 앞으로는 자위대의 활동을 묶어온 '족쇄' 를 푸는 쪽으로 방향을 틀 움직임이다.

일본 정부는 당장 평시에도 자위대가 영토.영해 침범사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자위대법 개정에 착수할 움직임이고, 국회에서 심의 중인 가이드라인 관련법안도 야당의 큰 반대없이 통과될 것이 확실시된다.

한국.중국 등 주변국은 일본의 대응에 복잡한 표정이다.

한국 국방부는 "일본 방위청이 23일 오후 6시30분쯤 전화를 통해 상황설명을 해왔다" 며 한.일 군 (軍) 긴급연락망이 처음으로 가동된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영해 침범 선박의 나포 실패로 일본내 비난여론이 비등해질 경우 일본 재무장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도쿄 = 오영환.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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