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역 대합실은 카페?…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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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역 (驛) 같지 않은 역' 이 있다. 밖에서 보면 분명 역사 (驛舍) 인데 안에 들어가면 그림이 걸려있고 음악이 흘러 '카페' 에 들어선 듯한 느낌. 명패도 멋스런 글씨로 '홍주사랑 (洪州史廊)' 이라고 쓰여있다.

홍주는 충남홍성의 옛 명칭. 장항선의 한 역에 불과했던 홍성역이 '전국 최고의 역' 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홍성역의 과거 별명은 '창고' .대합실 안은 휴지가 널리고 바닥은 침 등으로 지저분한데다 어둠침침해 사람들의 기피장소였다.손님들은 기차를 기다리며 역 안에 있기보다는 주변의 다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홍성역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96년10월. 현재의 역장인 유원상 (劉元相.54) 씨가 부임하면서부터. 철도청 전체에 이대로 가다가는 망한다는 위기감이 떠돌던 무렵이기도 하다.

'역 같지 않은 역' 을 모토로 내걸고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충청도 양반문화에 걸맞도록 시.서화를 전시할 생각을 갖고 작품을 모색했다. 하지만 '창고' 에 작품을 임대해줄 작가는 없었다. 내부를 깨끗이 정돈하고 곳곳에 섭외를 했다. 섭외 한달여만에 홍성출신으로 제주도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김구해 (金龜海) 씨가 "내 고향은 충청도 홍성이라네…" 라는 대형작품을 보내주었다.

감정가 1천만원을 넘는 걸작. 이 작품에 맞게 전시의 주제를 홍성으로 초점을 맞췄다. 이곳 출신 역사인물인 최영.성삼문.김좌진.한용운 선생의 영정을 내걸었다. 홍성군의 역사와 문화 유적을 소개하는 27개의 작은 액자도 마련했다. 출향인사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각종 대회에서 특선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작가에게 작품 대여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꺼리던 사람들이 홍성역 현장을 본 뒤 자발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국선 입선작 이상이 아니면 명함을 내밀 수도 없다. '홍주사랑' 에 전시됐던 작품만 1백여점이 넘고 상설전시품은 40여점이다. 1천만원이 넘는 작품만 9개에 달하고 총 가액을 합치면 수억원은 된다고 한다. 역 꾸미기에는 지역대학교수와 향토사학회.문화단체 등 지역 인사들이 조언을 하며 적극 참가했다.

홍성역이 변하면서 주위의 역들도 각기 테마를 갖고 꾸미기 시작했다.

대천역은 사진작가 협회와 협력해 사진작품들을 전시했고, 옹천역은 특산물인 오석 (烏石) 을 이용한 남포벼루와 석공예품 전시관을 마련했다.

이처럼 역들이 바뀌면서 장항선은 철도청 내에서 '문화.예술의 선 (線)' 으로 불리고 홍성역은 '전국 최고의 역' 으로 지난해 말 시상도 받았다.

소문이 나며 곳곳에서 역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 충북 제천지방의 역장 30여명은 지난해 12월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와 홍성역을 비롯해 장항선의 각 역들을 둘러봤다. 서예학원에서는 유명 작품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며 정기적으로 찾아온다.학생들은 방학숙제를 하러 역에 들렀고 별다른 문화공간이 없는 홍성에서 가족들의 저녁 나들이 명소로 떠올랐다.

홍성 = 이석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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