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찰이 쓴 학생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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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했던 김종필 (金鍾泌) 국무총리 경호차량 파손에 대해 경찰서의 정보과 학원반장 (경사) 이 총학생회 명의의 반성문을 조작해 보고한 사건은 나사가 풀릴대로 풀린 우리 경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낸 경우다.

더구나 간부도 아닌 학원반장이 학생들이 변상한 것처럼 꾸며 30만원의 변상금까지 대납했다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측은하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다.

우선 경찰이 총학생회 소속 학생의 이름을 도용, 도장을 새기고 반성문을 가짜로 작성한 것은 명백한 사문서 위조.행사에 해당하는 범법행위다.

특히 가장 기초적인 학교의 현장 정보를 담당하는 경찰서 학원반장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평소 일선 경찰의 정보생산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해준다.

아울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순간만 모면하면 된다는 무책임하고 무사안일한 근무자세란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가짜 반성문 작성은 바로 정보조작이요, 여론조작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이 사건이 학생들의 항의로 들통이 나지 않았다면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학생들이 반성문을 쓰고 변상까지 한 줄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일선에서의 조그만 정보조작이 엄청난 오판과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웬만한 정보조작쯤은 우습게 여기는 것이 체질화하지나 않았는가 반성하고 조직 자체의 구조적인 결함이나 문제점은 없는지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경호차량이 파손됐다고 경찰을 시켜 학생측의 반성문을 받게 하고 변상금까지 받아오도록 시킨 부분도 진상을 파악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행사장에서 발생한 국무총리 경호차량의 파손이 어떻게 일선 경찰의 책임인가.

또 학생으로부터 반성문이나 변상금 받아내는 일도 물론 일선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업무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상층부의 지시라 해도 업무영역이나 잘잘못을 분명히 가려 처리하지 못한 경찰 고위간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총리실 관계자는 경찰에 이같은 요구를 한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상부의 지시에 따른 일이라고 경찰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석연치 않게 한 하위직 경찰관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경찰을 비롯한 우리 공직의 일선과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위직들이 확인하고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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