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흑번필승, 중앙부분 '神書'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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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150년전 일본의 기성 슈사쿠 (秀策)가 이룬 흑번필승의 신화가 한국의 천재기사 이창호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 슈사쿠 시절엔 덤이 없었기에 흑이 유리한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흑에게 5집반~6집반의 덤이 있는데도 이9단은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

이9단은 97년 3월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흑으로 22연승을 기록중이다. 국내대회에선 흑으로 패한 일도 많지만 전력을 쏟는 국제전에선 흑만 들면 지지 않는다. 이9단이 흑으로 계속 이기기 때문에 현행 5집반의 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9단은 그러나 6집반의 덤을 주는 LG배에서도 흑으로 계속 이겼다. 지난주 2국까지 끝난 마샤오춘 (馬曉春) 9단과의 LG배 결승에서 이9단은 흑을 든 1국을 가볍게 이겼고 백을 든 2국은 고전끝에 역전승했다. 2국이 끝나자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LG배는 3대0이다. " 고 말했다. 제3국은 이9단의 흑번이니 두어보나 마나 이긴다는 얘기다.

그 옛날 슈사쿠는 어성기 (御聖碁)에 출전하여 이기고 돌아올 때 사람들이 결과를 물으면 "흑번이었읍니다. " 고만 대답했다고 한다. 오만한 얘기지만 그에겐 흑은 곧 승리였던 것이다.

본인방가의 천재기사였던 슈사쿠는 가문의 흥망이 걸린 어성기에서 전대미문의 19연승 (흑11승, 백8승) 을 거둬 훗날 기성 칭호를 받은 인물. 아쉽게도 33살에 요절한 슈사쿠는 흑번필승의 포석법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도면의 흑1, 3, 5, 7.이를 두고 흔히 '슈사쿠류 (秀策流)' 또는 '1, 3, 5 포석' 이라 하는데 흑7은 특별하게 '슈사쿠의 마늘모' 라 부른다.

평범하고 견실하기 짝이없는 이 마늘모는 덤이 없던 시절 흑을 쥔 슈샤쿠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세월이 흘러 현대적인 기전이 생기면서 흑은 선착의 잇점만큼 덤을 내게 됐고 그 덤은 4집, 4집반, 5집, 5집반으로 자꾸 늘어났다.

덤은 선착의 효과를 정밀하게 진단한 것이므로 이론적으로 현대바둑은 흑을 쥐든 백을 쥐든 차이가 없어야 옳다. 하지만 이창호의 경우는 다른 기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흑의 승률이 좋다.

왜 그럴까. 바둑계 인사들은 중앙에 대한 이창호의 특별한 계산능력을 말한다. 바둑판 361로 (路) 중 제5선 이후의 중앙은 수천년의 탐색을 거치고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다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중앙에 관한한 백보다는 흑쪽의 권한이 월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앙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창호는 흑의 효과를 최대한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슈사쿠는 선착의 효과에 착안하여 견실하기 이를데 없는 마늘모로 흑의 우세를 끝까지 지켜냈다.

간단하지만 훌륭한 전략이었다. 이창호는 남들이 모르는 흑과 중앙의 연결효과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여 싸우지 않고도 이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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