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량실업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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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재 유럽이 직면한 최대의 문제는 실업이다.

유럽연합 (EU) 15개국 실업자수가 1천6백50만명, 평균 10%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가장 높은 스페인이 13%,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12%, 독일이 10%다.

유럽의 실업률이 이처럼 높은 1차적 이유는 경기침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경기가 살아나도 실업이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량 실업은 세계적 현상이다.

현재 8억명 이상이 실업 또는 잠재적 실업상태에 있다.

선.후진국 구분이 없으며, 오히려 선진국이 더 심각하다.

거의 완전고용 상태였던 일본도 실업률이 4%를 넘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던 종신고용제.연공서열제는 이제 과거의 유물이 돼가고 있다.

실업은 복지제도에 악영향을 미친다.

실업수당의 증가는 국고를 바닥낼 뿐 아니라 복지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일하지 않는 자를 위해 세금을 쓰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지난달 한 신문 기고를 통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실업수당을 받던 시대는 지났다" 고 선언하고, 일을 하든가 아니면 직업훈련을 받든가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이다.

미국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 에서 제3의 산업혁명인 정보화.자동화로 경제 전 부문에서 기술대체 (代替)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이 일자리로부터 대거 추방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오랫동안 실직상태에 있어야 하고, 다시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과거와는 비교도 안되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또 직업 재교육을 받는다 해도 재취업할 확률은 아주 낮다.

프랑스 작가비비안 포레스테는 이를 '노동의 소멸' 이라고 표현한다.

사회가 더 이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과거 자본가에 착취당하던 때보다 더 끔직한 상황, 즉 노동을 착취당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한다.

사회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경제구조에서 '유용한' 자로 인정받지 못한 대다수 노동자들은 '반란의 규범' 을 따르거나 아니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업자수가 2백만명에 가까워진 미증유의 실업대란을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에도 드디어 대량실업시대의 재앙이 닥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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