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치논리에 밀린 의약분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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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 7월로 예정됐던 의약 (醫藥) 분업 시행이 또 연기될 조짐이다.

국민회의가 의사협회.약사회 등 관련단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약분업 시행을 연기키로 하고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게 이같은 내용을 보고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항생제.전문의약품 등은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사가 조제.판매토록 한다는 것이 의약분업의 골자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분을 지닌 의약분업이 63년 약사법에 규정된 후 의사.약사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바람에 3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보건행정이 얼마나 허약하고 무책임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정부는 65년 이후 80년대 말까지 여러 차례 의약분업 시행을 시도했다.

82년에는 전남목포에서 3년간 의약분업 시범사업까지 펼쳤으나 이때도 의사.약사간의 이견 때문에 실패했다.

결국 94년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99년 9월 이전 실시를 명문화했던 것이다.

의약분업은 의약품 오.남용 방지와 약값부담 절감, 의료인력의 효율성 제고 등 국민건강을 위해 하루가 시급한 제도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 제1의 항생제 내성균 보유국' 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을 정도로 항생제의 유통.남용 폐해가 심각한 실정이 아닌가.

보건복지부는 22일 올해 주요업무 추진계획에서 의약분업을 예정대로 올 7월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틀만에 집권당인 국민회의가 이를 뒤집었으니 국가 주요 정책이 또 정치논리에 밀린 셈이다.

복지부는 준비가 거의 완료된 상태라고 밝히고 있으나 국민회의측은 관련단체들의 '준비부족'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행에 앞서 이미 5년의 유예기간이 있었고 지난해부터는 의약분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준비해 온 마당에 시행 6개월을 앞두고 당사자들이 준비가 안됐다고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밖에 의약분업 실시 연기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진 일부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의 행태도 문제다.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 16명 중 9명이 의사.약사.제약업자 등으로 의약업계와 관련돼 있으며 이들은 여야 구분없이 국민건강보다 이익단체들의 주장을 반영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최근 법조인이 많은 법사위가 여론을 무시한 채 변호사법 개정안을 처리해 말썽이 됐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전문성을 중시한 상임위 배정방식에 회의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이제 더 이상 관련단체들이 의약분업 시행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일이고 속보이는 짓이다.

또 정치권이 이들의 압력이나 로비에 끌려다니는 행태를 보여서도 안된다.

준비 소홀로 혼쭐이 난 국민연금 문제에 놀라 의약분업 시행까지 연기하는 것은 잃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국민건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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