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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석학.정치지도자에게 듣는다]프랜시스 후쿠야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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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만난사람 = 유종일 KDI 국제대학원 교수]

- 교수님께서는 95년 펴낸 '트러스트 (신뢰)' 라는 책에서 한국이 비교적 신뢰가 낮은 사회라 규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셨지요.

"먼저 신뢰가 낮다고 해 꼭 한국 문화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고 또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도 낮은 신뢰 때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신뢰집단이 가족이나 가까운 친인척과 친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국의 상황은 중국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나 미국보다 혈연이나 학연.지연 등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한 조직이나 단체에 모여 신뢰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어렵지요. 사실 한국 재벌의 최고경영자들은 마치 가족들이 작은 가내공업을 운영하듯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영.승계 등과 관련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 전반을 살펴봐도 사회 구성원간 계급의식이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강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신뢰가 낮다고 볼 수 있지요. "

- 어떤 사람들은 국제수지 적자보다 '신뢰의 적자 (deficit of trust)' 가 한국의 금융위기를 촉발했다고 말합니다. 낮은 신뢰와 금융위기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봐요. 한국의 금융위기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한 뒤 단기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단기외채가 급증한 것 등이 원인이지요.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적 여파가 대단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거시경제 지표로 볼 때 한국 경제여건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요. 기본적으로 경제가 견실했지만 당시 단기적으로 신용.유동성 문제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젠 그 문제도 해결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기업의 구조, 민간기업과 정부의 관계에 심각한 신뢰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난해 경제위기와 직접적 상관은 없습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투명성 결여나 도덕적 해이.무책임한 대출관행 등 간접적으로나마 낮은 사회적 신뢰수준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 지적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는 대출이 투명한 방법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재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정부는 은행 대출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끌어왔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결코 투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재벌 내부에서 자금을 분배하는 방식도 서구 기업들처럼 경영진이 주주들의 의사를 묻고 또 주주들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만약 한국 기업환경이 좀 더 투명했다면 이런 식의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 사회적 신뢰가 어느 정도까지 문화적 산물이며, 제도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두 가지 모두 관련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법질서가 없다면 불신의 문화가 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재산권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또 사법부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인은 처벌하지 않으면서 피라미들만 처벌한다면 보통사람들은 냉소적 태도를 갖게 되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문화로 전이되고 불신의 문화가 팽배하게 됩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유교문화가 흔히 서구사회에서 부르는 가족주의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주의란 주된 사회관계가 구성원들이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혀 있는 비교적 작은 집단 내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의 행동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공직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

- 결국 문화적인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가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얽혀 있군요.

"두 가지가 연관돼 있습니다. 행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사법부를 만드는 것도 이 문제를 시정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감독하고 법을 집행하는 메커니즘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문화가 중요하다는 점은 판사 등 사법제도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법부 최고위층이 개인적으로 부패하면 그 어떤 제도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정치 엘리트들이 부패했다면 제도나 메커니즘을 아무리 바꿔도 문제를 시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

- 교수님께서는 재벌이 가진 문제의 일부는 문화적인 특징이나 낮은 신뢰 때문에 발생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재벌 문제가 문화적 특징에 기인한다면 재벌 개혁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벌 구조를 전면 해체하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재벌 구조에 문화적 요인이 개입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리의 대출을 다른 기업 대신 재벌에 몰아주는 정부의 정책이 없었다면 재벌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 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드러내놓고 대출 보조금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재벌의 부도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묵시적인 지급보증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시장상황으로 보아 너무나 위험하고 무모한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은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반도체.석유화학.자동차 등의 분야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

- 낮은 신뢰 수준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문화와 부패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한국 사회의 부패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조언해 주시지요.

"한국의 부패 문제를 문화적인 기준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의 경우 부패의 정도는 시기에 따라 편차를 보입니다.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 때는 부패가 만연했지만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비교적 개인적으로 청렴했던 까닭에 부패가 감소했습니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당시 부패가 있긴 했지만 마르코스 하의 필리핀에서처럼 부패가 만연하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한국은 일본에서처럼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가진 테크노크라트 (기술관료)가 한국 경제를 감독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이들이 심하게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인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부패 스캔들은 한국 정치 시스템의 민주화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는 더 많은 참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정치인과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뇌물수수를 통해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 한국 정치에 존재하는 낮은 신뢰 수준의 증거로는 지나칠 정도로 만연한 지역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갈등이 이렇게 심한 이유가 무엇이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지역갈등이 한국에서 다른 국가보다 왜 더 심하게 나타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출신지역이 다른 사람들은 성격이나 문화적 특징이 다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역갈등처럼 뿌리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손쉬운 해결책이 없다고 봐요. "

- 교수님께서는 적대적인 노사관계 또한 한국의 낮은 신뢰 수준을 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리해고와 임금삭감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노사관계가 평온했던 점은 뜻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시나요.

"노사안정도 어떤 측면에서는 모든 한국인들이 같은 배를 타고 있으며, 해결해야만 하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현재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세로 돌아설 때까지는 2~3년 전 있었던 것과 같은 노사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진정한 민주체제가 들어서려면 노사가 과거 권위주의 체제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사분쟁이 정치적인 논의를 통해 해결돼야 합니다. "

정리 =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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