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동의 '유령동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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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주 내내 터키의 텔레비전은 체포된 쿠르드인 항쟁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모습을 수십번 되풀이 방영했다.

복면한 특공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오잘란은 "나는 쿠르드도 사랑하고 터키도 사랑한다.

우리 어머니는 터키인이다.

무엇이든 터키를 위해 내가 공헌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이라고 호소했다.

정복당한 '악마' 의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는 2백여초짜리 이 장면을 보면서 터키 국민은 승리감에 도취했다.

이 승리는 쿠르드문제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터키 정부는 수십년간 계속해 온 쿠르드 탄압의 핑계로 오잘란 세력의 무장항쟁을 십여년간 이용해 왔다.

이제 무장항쟁의 뼈대가 꺾이고 나면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인을 어떻게 대할지가 본격적인 문제로 떠오른다.

2천여만 쿠르드인은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이다.

터키에 사는 1천만명만 해도 웬만한 나라보다 많은 인구다.

그런데 터키는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의 존재를 묵살해 왔다.

'산악계 터키인' 이란 이름으로 부르면서 독자적 언어와 풍습을 탄압했다.

일제 탄압이 가장 극심하던 시절의 내선일체 (內鮮一體) 정책을 연상시킨다.

15년 항쟁기간중 희생된 3만여 인명에 대한 책임이 오잘란 세력에 있다고 터키 정부는 주장해 왔다.

그러나 쿠르드인의 입장에서는 터키정부의 인권탄압과 잔혹한 진압방식에 더 근본적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유럽국가들은 어느 한쪽 주장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지난 가을 로마에서 체포된 오잘란을 터키에 인도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반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터키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잘란을 테러범으로 간주해 왔다.

오잘란체포를 둘러싸고 미국 - 이스라엘 - 터키 사이의 '유령동맹' 얘기가 나온다.

몇년 전부터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보이지 않으면서도 강고한 동맹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이다.

핵 (核) 비확산조약의 실행에 그토록 집착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핵무기는 눈감아주고, 중국의 인권과 티베트문제를 따지면서 터키의 인권과 쿠르드문제에 대해서는 터키 정부의 입장만 두둔하는 미국정책을 보면 그럴싸한 의혹이다.

오잘란 체포에 이스라엘 첩보기관이 개입했다는 풍설도 이 때문에 떠도는 것이다.

그런데 베를린의 이스라엘 영사관에서 쿠르드인 시위자들이 총격을 당한 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서둘러 미국의 개입을 시인한 것을 보면 삼각유령동맹의 존재가 더더욱 그럴싸하다.

터키가 쿠르드문제를 정말 잘 처리하지 않으면 세 나라 모두 만만찮은 곤경에 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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