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요르단의 과거와 현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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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아랍민족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연합국인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아랍인들을 이용했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후손인 명문 하심가 (家) 출신으로 이슬람 성지 (聖地) 메카의 태수 (太守) 로 있던 후세인에게 '아랍인 반란' 을 일으키는 대가로 전쟁이 끝난 후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후세인은 압둘라와 파이살 두 아들과 함께 봉기 (蜂起) 했다.

아랍 반란군은 남부 항구도시 아카바를 점령한 데 이어 트란스요르단 (요르단강 동쪽) 을 장악했다.

후세인은 1918년 다마스쿠스에 입성 (入城) , 파이살을 왕위에 앉혔다.

이로써 4백년에 걸친 오스만 투르크의 아랍지배는 끝났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가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도 이때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이크스 - 피코비밀협정에 따라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는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다.

이에 반발한 아랍인들이 군대를 일으키자 영국은 파이살을 이라크왕,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둘로 나눠 트란스요르단수장국 (首長國) 을 세운 뒤 압둘라를 수장 자리에 앉혔다.

트란스요르단수장국은 1928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트란스요르단왕국이 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인 46년 영국이 위임통치권을 포기하자 요르단 하심왕국으로 독립했다.

이어서 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제1차 팔레스타인전쟁이 일어났을 때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영토인 요르단강 서안 (西岸) 과 예루살렘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크게 넓혔다.

압둘라왕은 1951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아들 탈랄이 뒤를 이었으나 정신장애로 폐위 (廢位) , 53년 탈랄왕의 아들 후세인이 즉위했다.

후세인왕의 친서방노선은 아랍국가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67년 제3차 중동전에서 요르단강 서안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지략 (智略) 과 줄타기외교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겼으며, 말년엔 중동에서 가장 신뢰받는 평화중재자가 됐다.

후세인왕의 죽음으로 요르단은 다시 한번 위기에 처했다.

심각한 경제상황, 국내 불만세력과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이라크.시리아 등 주변강국들의 움직임이 불안하다.

왕위계승 과정에서 드러난 집안싸움도 문제다.

압둘라 신왕 (新王) 체제가 자리잡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후세인왕의 죽음으로 약소국 요르단은 커다란 시련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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