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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보지 못한 윤정희가 나올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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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윤정희씨는 “영화의 배역에 맞춰 파마를 새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는 잠시 예전처럼 손질하고 나왔다. 신동연 기자, [장소협조=서울프라자호텔]

“오늘 하루 종일 딱 한 컷을 찍었어요.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는 장면이죠. 문화원에서 시작(詩作) 강의를 하니까 듣고 싶은 사람 오라는. 그러니까, 영화 ‘시(詩)’의 처음 시작이네요.”

환갑을 넘긴 여배우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흘렀다. 25일 저녁 만난 자리에서다. 이 날 낮 그는 15년만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앞으로 석달여 이어질 촬영의 첫날을 기분좋은 긴장으로 마친 게 분명했다. 이 단순한 한 컷이 무려 9번만에 오케이가 났다는데, 피로는 커녕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굉장히 기뻐요. 이창동 감독이 얼마나 꼼꼼하고 철저한지, 아주 마음에 들어요.”

심지어 “9 라는 숫자도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 이 사람, 은막의 대스타 윤정희(65)씨다. 지난주 귀국 직후부터 의상과 분장 등 최종 의논을 마치고, 이날 새 영화‘시(詩)’의 촬영을 시작한 주인공이다.

그가 연기할 인물은 60대 할머니다. 생활보조금을 받아 사는 처지다. 딸이 맡기고 간 10대 외손자까지 키운다. 형편이 넉넉할 리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소녀니까요. 매력적이죠.” 고혹적 외모와 연기로 1960년대부터 스크린을 누볐던 이 배우는 “주인공이 저랑 비슷한 점이 꽤 있다”고 했다. “꽃만 봐도 너무 좋아하는 감성이 그래요. 저도 나이가 몇인데, 여전히 청춘이려니 하면서 살죠. 아마 제 또래분들께 여쭤보면 다들 그럴걸요. 나이 생각 안해요. 우리 나이가 되면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40여 년 연기 인생의 이 배우도 이번의 역할을 두고 "너무 매력적이되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이 칸영화제 수상작 ‘밀양’ 이후 2년만에 내놓은 이번 시나리오에는 어느 전작 못지 않게 극적이고 절절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주연배우는 “나중에 감독에게 들으라”며 말을 아꼈다. 대신 감독과 작품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넘치게 쏟아놓았다. “이 감독 작품이야 ‘초록물고기’ ‘오아시스’등 다 봤죠. 감독으로도 좋고, 인간적으로도 좋아요. 참 진실성 있고 순수해요. 특히 예술가로서 책임감이 대단해요.”

이 감독이 출연을 제안한 건 지난해의 일이다. “그 전에는 부산영화제 같은 공식행사에서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죠. 우리 부부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처음 얘기를 했어요.”

이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의논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주인공 할머니의 이름은 미자, 윤정희씨의 본명(손미자)과 꼭같다. 윤씨는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도 강한 믿음을 표했다. “모든 연기자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해요. 자연스럽게, 보통 생활하듯 하라는 거죠. 배우에게 퍽 힘든 일인데,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기회죠.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연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에 빠져드는 경험이니까요. 여태까지의 윤정희가 아닌, 새로운 윤정희가 이 영화에서 나올 것이라고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이런 연출 덕분에 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연기력의 한계를 넘나드는 마음고생을 겪곤 한다. “그런 얘기는 이미 많이 들었는데, 오늘 우리는 참 재미있게 찍었어요. 가볍게 찍었다는 게 아니라, 감독이 원하는 바를 저도 긍정하고, 모든 스태프가 마음을 같이 했다는 뜻이죠. 힘들다는 건 아마 감독이 욕심나는 데까지 계속 (촬영을)한다는 걸텐데, 저도 감독 못지않게 욕심이 많아요. 모니터를 보며 감독이 ‘더 합시다’ 하면 제가 또 ‘이런 걸 좀 더 합시다’, 서로 이러면서 찍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배역에는 그의 욕심이 뚜렷했다. “제 프랑스 친구 하나가 너,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있지, 하면서 한동안 귀찮게 하기도 했어요. 그건 아니에요. (15년 동안 출연작이 없었던 건)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죠.”

널리 알려진 대로 이 당대의 톱스타는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결혼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결혼을 계기로 은퇴하는 여배우가 적지 않지만, 그는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에 살면서 작품 편수가 줄었을 뿐, 한국에 돌아와 영화 찍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40대로 접어든 80년대 말 ‘위기의 여자’는 물론, 90년대 초에도 ‘눈꽃’ ‘만무방’에서 주연을 맡았다. 6·25를 배경으로 분단의 비극을 그린 94년작 ‘만무방’은 그에게 생애 두번째 대종상 여우주연상도 안겨줬다. 이후로도 늘 “영화를 계속하겠다”고 밝혀온 그다.

“배우라는 건 인간을 그리는 일이잖아요. 인간이 10대, 20대만 있나요. 저는 70대라도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할 겁니다.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건 배우로서 제 자존심이구요.”

현재 백건우씨는 파리에 머물고 있다. 다음달초 이탈리아에서 열릴 협연 준비에 한창이다. 남편의 음악에 아내가 늘 최고의 조력자이듯, 아내의 영화에는 남편이 그렇다. “함께 시나리오 분석한 게 도움이 많이 돼요. 서로 이야기하면서 아이디어도 얻고. 그래서 국제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네요. 예전에야 의상도 (배우가) 직접 준비했으니, 함께 사러다니곤 했죠.”

이번 ‘시’에서 보게 될 그의 모습은 화장기 없는 퍼머 머리다. “이쁘게 보이고픈 생각도 없고, 또 이번 영화는 제가 이쁘게 나오면 안되는 영화에요.” 소녀 같은 미소 위로 여배우의 당당한 관록이 내비쳤다.

이후남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인터뷰 전문은 30일자 중앙SUNDAY에 실립니다.

◆윤정희= 1967년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70년대 문희, 고(故)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하며 약 300편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몬트리올·도빌 등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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