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중기 '설 자금 아우성'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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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설 자금대란이 사라졌다.' 통상 설 직전 월말께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자금난' 이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하다.

우선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창구가 썰렁하다. 월말을 앞둔 이맘때면 중소기업 이익단체나 근로자단체의 단골메뉴였던 자금 추가방출, 체임 (滯賃) 해소 요구라든가 월말 부도대란설 등도 거의 자취를 감췄다.

물론 기업 자금사정이 갑자기 나아졌기 때문으로 보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대신 은행권의 중소기업자금 방출로 전반적으로 시중자금에 여유가 있는 반면 기업들은 워낙 허리띠를 졸라매다 보니 자금수요가 많지 않아 바둥바둥 돈을 구하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근로자들의 설 상여금 요구가 줄어든 것도 명절 자금난 완화에 한몫 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신용도가 떨어지는 영세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그림의 떡' 에 불과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종전과는 딴판이다.

◇ 썰렁한 대출창구 = 중소기업은행 서울 신문로지점 중소기업 대출창구에는 지난해말만 해도 하루 평균 5통씩 왔던 대출문의가 최근 들어 뚝 끊겼다.

연말 자금수요가 몰린 지난해 12월만 해도 중소기업 대출실적은 45건에 달했지만 올들어 26일까지 4건에 불과하다는 것.

박종권 지점장은 "지난해 추석때만 해도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자금의 가수요까지 붙어 중소사업자들이 돈 꿔달라고 아우성이던데 비하면 너무 한산한 편" 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행권에선 신규거래를 할 유망 중소기업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지자 보다 좋은 조건을 내세워 타은행 고객을 빼앗아오기에 혈안이 될 정도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조사처에는 예년 같으면 "은행들이 돈을 안꿔준다" 는 민원전화가 줄을 이었으나 요즘엔 "시중금리가 떨어졌다는데 왜 우리 대출금리는 안내리느냐" 는 전화가 간혹 걸려올 정도라는 것. 중앙회 조유현 부장은 "설을 앞두고 회원사들이 이렇게 잠잠한 적은 처음" 이라고 말했다.

인천 남동공단 소재 상용차 부품업체인 우진기계공업의 최금석 사장은 "지난해 가을부터 자동차 수출경기가 다소 풀리면서 공장가동률이 높아지자 인근 은행지점에서 돈 꿔가라고 야단이어서 계속 거절하고 있다" 고 말했다.

◇ 풀린 돈이 많다 = 설 자금난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금수요는 크게 준 반면 정부의 중소기업 대출 드라이브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강하게 걸리면서 자금이 많이 풀렸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6월말 92조5천억원까지 줄었던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잔액은 연말 96조원으로 1년 전의 1백조원 수준에 육박했다.

이 중 금리가 낮은 신용보증기금 등의 기관보증 신용대출액도 33조원이나 돼 지난해말 현재 중소기업 당좌대출 금리가 10.7%까지 떨어지는데 큰 몫을 했다. 이는 거의 대기업 대출금리와 맞먹는 수준.

한은 금융시장부 오세만 과장은 "기업마다 시설투자를 줄이고 인력.임금을 30%까지 줄인데다 물품대금 결제과정에서 어음 대신 현금을 선호하는 거래관행이 형성되면서 그만큼 돈 빌리기를 꺼리는 실정" 이라고 말했다.

한은 조사결과 체임 규모가 꾸준히 늘긴 하지만 상당부분 지난해 상반기 살인적인 신용경색 상황에서 부도를 맞은 기업들 몫이어서 체임해소를 위한 자금수요도 연초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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