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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가문의 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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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고(故)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요양 중일 때다. 그는 “형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정치에 입문한 것처럼 내가 죽으면 로버트가, 그 다음엔 에드워드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했다. 케네디 가문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요트 조종법을 배울 때도 형제가 순서대로 서로를 가르쳤다. (AP통신, 『케네디가의 영광과 비극』)

케네디 전 대통령은 1963년,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은 68년 대선 후보 경선 중 암살됐다. 그리고 막내 ‘테드’(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마저 25일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케네디 왕조’로 불렸던 한 세대가 끝난 것이다.

술통 만드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로 시작했던 케네디 가문은 4대째에 대통령을 배출했다. 온 집안이 조직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어머니와 자매들은 선거 때면 ‘케네디에게 투표하세요’라고 수놓은 치마를 입고 집집마다 방문했다. 상원의원 선거 땐 집에서 티파티만 23번을 열었다. 모두 7만 명이 다녀갔다.

‘가문의 영광’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버지 조셉 P 케네디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기는 버릇’을 길러주었다. “1등을 해라, 2등 이하는 패배다”가 그의 입버릇이었다. “우리 집에 싸워서 지는 개는 필요 없어. 이기는 개가 좋아”라고도 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우리 모두가 최고가 될 순 없었지만, 되려고 기를 썼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면 용서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오오마에 마사오미, 『케네디가의 인간학』)

한국에는 보다 유서 깊은 정치 명문가가 있다. 백사 이항복의 가문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는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다. 청백리로도 이름을 떨쳤다. 백사 이후 8대 연속으로 판서(장관급)가 나왔다. 재상을 지낸 이들의 문집인 ‘상신록(相臣錄)’이 집안에 내려올 정도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백사의 집안은 일제시대 새로운 ‘가문의 영광’을 이룬다. 백사의 10세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6형제 전원이 독립운동을 위해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6형제와 그 자손들까지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다.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남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 정치 명문가의 맥은 끊기지 않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우당의 손자다.

구희령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