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선 책 무한 대출 … 지금 빌려보는 것만 260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경쟁을 싫어하는 국내 풍토로는 세계적 대학을 키울 수 없다.”

“국내 대학은 좋은 학생 뽑는 데만 신경 썼지 정작 교육에는 소홀하다.”

이장무(右) 서울대 총장이 24일 저녁(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하버드대 앞 한식당에서 이 학교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 총장은 학생들로부터 유학 생활 중 느낀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 등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들었다. [케임브리지=정경민 특파원]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쏟아놓은 쓴소리다. 이들은 24일(현지시간) 저녁 학교 앞 한식당에서 가진 이장무 서울대 총장과의 간담회에서 유학생활 중 느낀 한국 대학 교육에 대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 총장은 “유학생들의 생생한 현장경험을 국내대학 발전에 반영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모임은 이 총장이 “대학 발전을 위해 학생들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며 마련했다. 28명이 참석했다. 졸업한 대학은 다양했다.

▶김○○(사회학)=국내에도 좋은 대학이 많다. 그러나 세계적 학자를 배출하는 학교는 드물다. 가장 큰 이유는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내부자끼리는 좋겠지만 학문 발전엔 걸림돌이다. 본교 출신끼리 봐주는 풍토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학 간에 훌륭한 학자를 교류하고, 선의의 경쟁을 이끌어 내야 한다.

▶심○○(이론화학)=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하버드 학생이 국내 학생보다 뛰어난 건 아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온 다음에는 확 달라진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곳 교수진은 강의계획서 하나도 성의를 다해 만든다. 개강 전에 만들어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미리 검토해 선택할 수 있게 한다. 강의에 대한 열의도 강하다. 이곳에선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게 일상화돼 있기 때문이다. 평가 점수도 공개된다. 한국에선 좋은 학생을 뽑는 데만 신경 쓸 뿐 가르치는 데는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총장=국내 교수는 강의보다 연구에 치중한다. 연구 실적이 업적 평가에 더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선 교육도 연구 못지않게 중요하다. 서울대는 지난해부터 강의 평가를 통해 상위 10% 교수에게 시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평가는 동료와 학생으로부터 받는다. 이런 제도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다만 학생도 달라져야 한다. 과제가 많거나 어려운 강의는 피하려 하니 교수 입장에서도 강의 준비가 어렵다.

▶김○○(중국미술사)=역사학 전공자에게 책은 필수다. 그런데 서울대 도서관에선 중국·일본에서 출판된 책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박사과정이라도 대출할 수 있는 책을 20권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여기선 무한정 대출받을 수 있고 오랫동안 봐도 된다. 그만큼 책이 많다. 개인적으로 빌려보고 있는 책만 260권이다. 지도교수와 자주 만나 연구방향에 대해 깊이 있게 토론할 수 있는 것도 한국과 다르다. 학제 간 교류도 배울 점이다. 하버드에선 미술사를 전공하면서도 역사는 물론 종교·문학 강의를 자연스럽게 접한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총장=미국 대학의 교수와 학생 간 긴밀한 스킨십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국내에서도 학문 간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연계과정을 많이 늘리고 있다. 자유전공학부라는 것도 있다.

▶박○○(건축학)=유학 온 지 얼마 안 돼 이번 여름에 영어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중국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탁월해 놀랐다. 학부에 영어 강의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대학들도 학부부터 영어 강의를 늘릴 필요가 있다. 중국 학생은 발표 수업에도 익숙했다. 교수의 질문에 한국 학생은 눈길을 피하기 바쁘지만 중국 학생은 서로 답변하려고 경쟁한다. 국내 학교의 수업방식도 바꿀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 인용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문○○(사회학)=얼마 전 도쿄대에 갔더니 거기도 국제화가 화두더라. 그러나 외국 학자 불러다 국제학술포럼 하는 걸 국제화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국내 대학의 국제화도 이런 방향으로 가선 곤란하다. 자기 만족을 위한 국제화는 의미가 없다.

▶김○○(정치학)=학부를 미국에서 졸업해 한국 사정은 잘 모른다. 다만 미국 학교에서 느낀 건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사람들의 목표가 다양하다는 거다. 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는 사람이 많다. 개인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국제기구 같은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

케임브리지=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