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에 묻는다]한국지식인 사회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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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20세기에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만큼 찬사와 단죄가 교차한 것은 없다.

근대 이후 이성은 신의 섭리에 의해 가치가 부여되었던 세계를 계산가능한 인간지식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해방과 진보를 약속하는 휴머니즘 실현의 주체였다.

그러나 그 이성이 인류위기의 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이성.과학기술.합리화 등이 약속했던 인간의 해방 보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의한 대중조작, 관료적 지배에 의한 자유의 상실을 야기하기 시작한 즈음 이성은 니체를 비롯한 철학자들에 의해 현대사회의 위기화 현상의 주범으로 단죄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1, 2차대전과 인종청소 등 도덕적 이유를 상실한 인간살육,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파괴는 인류의 발전을 더 이상 이성에 기대할 수없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이와 맞물려 탈근대 (post - modern) 는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으며 근대적 이성에 남아있는 진보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성주의자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성 = 폭력이라는 장 - 프랑소아 료타르와 비합리주의.신비주의야 말로 폭력의 주범이라며 기술적.계산적 이성을 넘어 타인과의 의사소통과 연대 속에서 이성의 실현을 주장한 위르겐 하버마스의 논쟁이 대표적. 한국사회에서도 90년대 들어서면서 탈근대론적 시각이 급격히 확산되었으며 이는 진보에 대한 희망이 허물어진 경험과 무관치 않았다.

혁명이 운위되던 격동의 80년대.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예측된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 진보에 대한 기대가 80년대 말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여지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좌파는 오히려 보수성을 노정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도대체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며 무엇이 인간을 변화시키는가' 라는 아포리아 (難問)가 던져졌으며, 이에 대한 대답으로 육체.욕망.대중문화는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탈근대론은 바로 근대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에서 나타난 병폐의 한 단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특히 경제위기는 탈근대론이 근대적 해방마저도 실현되지 않은 한국에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한국사회의 진실을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고 급격히 소멸해갔다.

이같은 상항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근대화에 대한 성찰. 근대가 가져온 병폐를 성찰하면서 근대의 해방가능성을 실현하자는 것.

독일의 사회철학자 울리히 벡의 '성찰적 근대화' ,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에 의한 민주적 연대, 좌.우를 넘어서는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이 지식인 사회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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