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묘비명 해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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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1961년 5월 16일, 민의원 당선통지서를 받은 김대중은 태평로를 나섰다. 그때, 굉음을 일으키며 중앙청으로 진격하는 쿠데타군의 맹렬한 행렬과 마주쳤다. 그는 직감했다. 손에 쥔 당선통지서가 휴지조각이라는 사실을. “이제 할 일은 군부정권과의 싸움이야”라고 구겨진 통지서가 그에게 임무를 발령했다. 그 명령은 청년 정치인 김대중에게 고난의 길을 예고했다. 당시 국민소득 100달러, ‘김대중의 민주주의’가 개화할 수 있는 6000달러 고지는 아득히 멀었지만 그의 도전정신이 백의종군하는 그를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김대중은 장군복을 입은 초년 정치인 박정희와 대적하는 것으로 60년대를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긴장을 버리지 못한 박정희의 초기 정치는 김대중의 불도저식 저항을 감당하지 못했다. 박정희의 건설 구호와 김대중의 민주 구호가 뒤섞였다.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72년, 김대중식 민주이념은 급기야 산업화의 용광로에 처박혔고, 용공 혐의와 함께 현해탄에 수장될 운명에 처해졌다. 당시 국민소득 500달러, 박정희는 김대중을 추방하고 냉혹한 권위주의 기구들을 전격 가동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세계적 기록을 경신할수록 사지(死地)에서 헤매던 김대중에게는 구원의 빛이 된다는 사실을 박정희는 외면했다. 경제성장은 권위주의가 목을 맨 경제업적이었지만 결국 독재의 기반을 갉아먹는다는 정치경제학적 법칙을 박정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국민소득 2000달러, 박정희는 자신의 최고 심복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80년 ‘서울의 봄’, 불굴의 투지에 불을 붙인 김대중은 더 강경한 군부가 몸을 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의욕 충만했다. 자신의 정적 김영삼도 느닷없이 찾아온 새벽에 환호했다. 그때, 전두환 장군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무대를 장악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기어이 오고야 만다’던 그 새벽은 7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닭 모가지는 여전히 비틀어져 있어야 했다. 김대중은 사형집행을 겨우 면하고 이국 산천을 떠돌았다. 87년 국민소득 3000달러, 시민항쟁의 새벽이 또다시 밝자 민주투사들이 앞다투어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민도(民度)는 김대중의 민주주의를 여전히 수용하지 못했다. 불안한 국민들은 장군복을 벗은 또 다른 정치인을 청와대로 보냈다. 92년, 7000달러로 수직상승한 민도는 김대중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반격에 휘말렸다. 71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자신이 구사했던 바로 그 연합전술로 김영삼에게 패했다. 김대중은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 애달픈 은퇴사가 잊혀지기 전에 정계로 돌아왔다.

97년, 국민소득 1만 달러, 국민들은 드디어 그에게 대권(大權)을 허락했다. 쉽지는 않았다. 충청도 지원군과의 협공으로 경상도 군단을 물리친 것이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을 자처했지만, 오히려 준비된 쪽은 한국 사회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빠진 유권자들이 자책감과 함께 그를 권좌로 불러들였다. 그의 집도(執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위기 돌파의 고수 김대중의 노련한 정치가 효력을 발했다. 2년의 집도가 성공리에 끝나자 김대중은 필생의 사업에 매진하기 위해 평양으로 날아갔다. 국민소득 1만2000달러, 한국 사회는 대북(對北) 진보정치를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었다. 2000년 가을,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스웨덴 한림원은 세기의 부랑아 북한을 길들인 공적을 높이 샀지만, 우리에게는 국민소득 100달러에서 1만 달러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道程)의 온갖 투쟁과 저항을 대신 짊어진 순교자의 의미가 더 커 보였다.

2009년 4월, 그는 젊은 시절의 분신이자 그보다 더 무모하고 순진무구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일갈했다. 반민주 권력에 아부하지 말고 들고 일어나라고. 육신은 쇠락했지만, 열정은 펄펄 살아 있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임종 일기에 썼을 때, 그는 자신을 괴롭힌 세상과 화해했다. 그는 빈곤한 나라의 궁핍한 정치를 민주주의의 궤도로 쏘아 올린 발사체였다. …

하의도 섬 소년은 위대한 정치인이 되어 떠났다. 1만 달러 수준에서야 비로소 꽃피었던 한국의 민주주의를 100달러의 암흑지대로부터 꿈꾸고 달려 왔던 그가 있었기에 환한 세상을 누리는 우리들은 그가 떠난 태평로에 남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