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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광화문 광장에서 국운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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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1894년 봄, 한양 도성(都城)에 들어선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깜짝 놀랐다. 빛바랜 왕궁과 초라한 민가만으로 이뤄진 500년 도읍지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개화정치가 한창 진행 중이던 당시 일본에서 신사와 불교사원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역사 건축물들과 갓 유입된 서양문물이 뒤범벅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영국 왕립학회 회원인 그녀에게 한양은 외부 침입자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은둔의 영토’ 그 자체였다. 비숍 여사가 발견한 은둔의 비결은 쇠잔, 스스로 삭아 무너짐, 그것이었다. 한강과 대동강 주변에 번성했던 고읍의 쇠락한 모습, 읍내와 산성 곳곳에 시체 더미로 남아 있던 청일전쟁의 잔해에서 비숍 여사는 조선의 멸망을 목격했다. 15년 후 조선은 세계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조선이 광화문 광장으로 생환했다. 육조(정치)와 시전 상권(경제)을 좌우대칭으로 거느리며 그 중심을 관할하던 곳, 사대부의 통치철학이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변혁을 거듭해야 했던 곳,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협하던 내우외환의 말발굽 소리가 고서의 퀴퀴한 냄새만큼이나 진하게 묻힌 광화문 광장. 그러나 거센 물결에 휘말려 조선이 정신적·물질적 원형이었음을 본격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100년 세월의 몰각을 이제야 현대적 조형으로나마 자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치사의 영욕 속에 멀리 유배되었던 북악(北岳)이 성큼 내려와 앉았는데, 광장을 휘도는 역사물길에서 민족성의 기원을 확인하고 바닥돌에 음각된 역사적·문화적 사건들로부터 우리의 원적(原籍)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고아의식 같은 허허로움으로 달려왔던 100년의 간난(艱難)이 뿌리의 확인만으로 간단히 치유될 수야 있겠느냐만, 그래도 국운을 이만큼 키워냈던 비결을 답하라면 주저 없이 가리킬 수 있는 두 위인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세종과 충무공.

세종이 창제한 우리 문자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근대화는 아마 30~40년 늦춰졌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은 자국 문자가 없어 국가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꽤 애를 먹었고, 더러는 급한 대로 제국 열강의 문자를 수입하기도 했다. 세종이 국자(國字) 창안에 그토록 몰입했던 이유는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의 서문처럼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으로서…자연으로서 이룩하신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어리석은 백성을 훈도하는 위민(爲民) 통치의 요체가 문자 창제였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 문자의 명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민중을 훈도하는 바른 소리였다. 수만 개의 어휘를 분해해 28개의 음소를 찾아내고 발음기관에 맞춰 기호화한 당시의 성음학과 문자학은 현재의 수준을 능가했을 것이다. 세종은 신문자(新文字)의 표음 기능을 실험하기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손수 지었고, 사서경전과 두보의 시를 번역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완벽. 집현전 학사들이 지은 ‘용비어천가’는 당대 세계적 사상가들도 범접할 수 없는 명징한 정신으로 빛난다. 이 천상의 문자로 우리는 20세기의 격랑을 헤쳐 왔던 것이다.

문무(文武)의 극치를 ‘성문신무(聖文神武)’라고 한다면, 한쪽은 세종이 다른 한쪽은 충무공이 지키고 있다. 쾌속정이자 전함이었던 거북선은 무도(武道)의 신문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당대 최고의 전략무기가 백의종군했던 무장(武將)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사실, 육군이었던 그가 어느덧 바다의 조련사로 변해 수백 척의 적함을 종횡무진 깨뜨렸다는 사실은 지덕용(知德勇)을 갖춘 그의 천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장졸과 촌부들의 지혜를 모으고, 전국의 장인들이 앞다퉈 비밀병기 제작에 헌신토록 한 집현(集賢)의 지도력, 그의 누추한 함대와 더불어 수장(水葬)을 각오한 일자진(一字陣)의 위민정신이 조선의 위태로운 바다를, 한민족의 운명을 지켜냈던 것이다. 기적을 제조한 무장의 과학은 세종처럼 봉공(奉公)을 향한 집현 정신의 창조물, 바로 그것이다.

100년 전 조선은 자폐적인 정신세계에 갇혀 결국 고사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10년 동안 허덕였던 지금 우리의 현실도 육조거리를 물들인 소모적 정쟁과 자폐적 논쟁에 연결돼 있을 것이다. 일본이 목을 죄어오던 1897년 비숍 여사는 광장에 모인 성난 군중을 보면서 조선을 떠났다. 한국의 지난 세기는 ‘분노의 꽃’이었다. 그 분노는 멸사(滅私)나 봉공보다 한풀이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국운, 그 에너지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비숍 여사가 다시 광화문 광장에 들른다면, 두 성인의 정신적 유산, 위민과 집현을 주저 없이 일러줄 것이다. 통합정치(위민)를 통해 집단지능(집현)을 높이는 것, 그것이라고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