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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인터뷰]英 케임브리지대 존 던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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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감부터 스산한 세기말. 제2의 밀레니엄까지 막을 내리고 있어 세상은 더욱 들떠 있다.

세계 여러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경제위기, 발칸반도의 민족분규, 이라크 사태, 북한에 만연한 기아가 막연한 종말의식을 부추긴다.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우리는 지난 1백년과 1천년의 회고 위에서 21세기와 제3의 천년을 전망하지 않을 수 없다.

중앙일보는 '밀레니엄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 세계 각국, 각 분야 권위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야심적인 계획을 세웠다.

밀레니엄 인터뷰의 첫번째 손님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정치학교수 존 던 박사. 그는 케임브리지대를 통틀어 3명뿐인 정치학 프로페서 (교수) 의 한사람으로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전화대담=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김 = 헨리 키신저는 각 세기마다 마치 자연법칙에 의한 것처럼 국력과 의지와 지적.도덕적 추진력을 가진 강대국이 등장해 그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국제 질서를 바꾼다고 말했습니다. 17세기의 프랑스, 18세기의 영국, 19세기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20세기의 미국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21세기는 어느 나라의 차례입니까.

던 = 어느 한 나라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50년 전이라면 소련, 15년 전이라면 일본, 그리고 20년 뒤라면 중국이라고 하겠지만 소련의 붕괴와 일본경제의 후퇴를 보면 어느 단일국가가 독주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지금은 미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지만 지난 50년 동안 세계적으로 누린 영향력을 앞으로 50년 더 누리지는 못할 겁니다.

김 = 미국의 영화 (榮華)가 50년이 아니라면 얼마나 더 계속됩니까.

던 = 미국 경제에 달렸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미국이 앞으로 적어도 20년은 세계에서 가장 파워가 있는 나라로 남지 않을까요.

김 = 많은 학자와 문명사가들이 20세기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세기,가장 유혈이 낭자한 증오할 세기, 엄청난 살육이 자행된 세기로 기억합니다. 던 교수의 20세기는 어떤 것입니까.

던 = 명암 (明暗) 의 양쪽을 보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요. 20세기가 가장 잔인한 범죄를 경험한 건 사실이지만 인류는 빛나는 건설의 업적도 남겼습니다.범죄행위와 건설적인 행위는 불가사의하게 깊이 연관돼 있어요. 한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능력과 선행을 하는 능력은 함께 성장하는 걸 보게 됩니다. 지금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김 = 새해 첫날 유럽공동체 15개국중 11개국에서 '유로 (Euro)' 라는 단일통화가 등장합니다. 유로권은 달러 위주의 세계경제를 크게 바꾸게 됩니까.

던 = 유럽경제는 미국 경제만큼 다이내믹하지 않습니다. 유로권에는 경제적으로 미국을 대체하는 세력이 되겠다는 정치적인 의지가 없어요. 유럽에는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 하겠다는 통합된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얘깁니다. 유럽은 아주 지친 대륙입니다.

김 = 미국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간의 충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겁니까.

던 = 미국과 영국은 좋은 의미의 서양문명의 모범이 아니고, 사담 후세인도 이슬람문명을 대표하지 않아요. 미국.영국과 이라크 양쪽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문명권에 결속을 호소하는 일면이 없진 않지만 그들의 호소에는 반응이 있을 수 없어요. 그들은 각자의 문명권을 대표하지 않으니까요. 헌팅턴은 문제를 잘못 짚고 있습니다.

김 =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위한 마지막이고도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는 게 곧 드러났습니다. 시장과 민주주의, 시장과 국가 (정부) ,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서유럽을 휩쓰는 제3의 길이 해답이 됩니까.

던 = 제3의 길은 무엇을 하기 위한 효과가 입증된 구체적인 방법이 못됩니다. 제3의 길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그건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거부입니다. 그러면서도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구별하기 어려운 경제체제를 수단으로 채택한 사회민주주의의 장기적인 '정치적 목적' 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3의 길은 시장과 민주주의, 시장과 국가의 긴장관계를 해소하지 못해요. 그런 긴장은 해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김 =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과의 거리는 어떻습니까.

던 = 제3의 길이 경제 용어로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경제적인 분배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입니다. 분배의 문제에서도 분배의 결과가 아니라 분배에 대한 태도만 다르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김 = 그래서 유럽 대륙의 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호응이 그렇게 저조합니까.

던 = 대륙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3의 길이 경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를 너무 많이 수용한다고 불평합니다. 독일 재무장관 오스카 라퐁텐과 프랑스 재무장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 과감한 케인스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합니다.

김 =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노선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추진입니다. 金대통령 주변에 있는 지식인들은 金대통령의 노선이 제3의 길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金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좇는데 성공할 것 같습니까.

던 = 한국의 사정과 영국.독일.프랑스 등의 사정은 많이 달라요. 한국 경제위기의 두가지 중요한 원인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라고 하겠어요. 金대통령은 이 두가지에 대해 합리적이고 주어진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경제의 구조조정과 효율화는 장기적인 요구를 반영하는 고전적인 신자유주의 처방입니다. 한국정부는 단순히 자본주의라는 토끼가 아니라 '효율적인 자본주의' 라는 토끼를 좇는 것이 중요합니다.

金대통령은 그의 정치생애 내내 사회갈등을 덜 권위주의적이고 덜 탄압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방식을 대표해 왔기 때문에 분배에 대한 그의 입장도 다르다고 봐요. 국민들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분배와 경제의 구조조정을 동시에 추진하는 과제는 한국의 오늘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이 두가지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시장과 분배간 비율의 문제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정한다는 자세는 현명합니다.

김 =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영국 사람들 이상으로 케인스주의적 수요관리를 신봉한다는 관측이 있습니다. 왜 케인스가 부활하고 있습니까.

던 = 케인스의 부활이 독일과는 관계없어요. 케인스가 부활하는 건 근본적으로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위협 때문입니다. 그런 위협 앞에서 지난 25년간 유행했던 포스트 - 케인스적인 경제정책은 무력해요. 앞으로 몇십년동안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할 걸로 봅니다.

김 = 자유방임주의는 영원히 사라진 겁니까.

던 = 자유방임주의의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는 가에 달렸어요. 경제주체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게 바람직할 때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자유방임주의는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고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돌아옵니다.

김 =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만 해도 중국과 아랍세계, 유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세계의 과학과 기술을 지배하고, 유럽은 5세기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16세기까지 암흑시대에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낙후는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던 = 아시아가 낙후한 게 아니라 유럽이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유럽이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파워와 부 (富) 와 능력에서 발전을 이룩한 이유를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어요.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가 대단히 강력한 체제고, 여러가지 우연적인 이유로 그 체제가 세계의 어느 곳 보다도 유럽에서 먼저 뿌리를 내리고 확산됐습니다. 그러나 그 체제는 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어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그걸 성공적으로 모방했어요. 그런 모방의 프로세스가 한번의 금융위기로 중단되지는 않습니다.

김 = 아시아는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던 = 장기적으로 볼 때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 아래에서 선진 자본주의 경제를 운용할 수는 없어요. 경제적인 역동성을 유지하는데는 국가 차원에서의 민주적인 정치조직이 필수적입니다.

김 = 아시아가 금융위기를 맞으니까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뜸 아시아 가치관의 실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어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던 = 그건 아시아인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정경유착은 아시아적 가치도 아니고 서양의 가치도 아닙니다. 아시아 고유의 가치가 있다면 그건 종교적.도덕적.문화적 가치일 것이고, 그런 가치들은 경제의 효율성을 오히려 높인다고 생각해요.

김 = 칠레의 전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유럽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던 =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법정이 이 사건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가, 그리고 피노체트 재판의 관할권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가령 일본인이 그가 통치하는 칠레에서 범죄적인 박해를 받았다면 그는 일본의 법정에도 설 수 있어요. 하나의 문명이 인권문제에 대한 법적인 관할권을 가진 반면 다른 문명에는 그런 관할권이 없다는 식의 문제가 아닙니까.

김 = 베트남전쟁을 확대한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이 살아 있어 동남아시아 방문중에 체포돼 재판을 받게 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던 =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존슨이 동남아시아에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데 본질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봐요. 김 = 클린턴이 탄핵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그는 탄핵받아 마땅합니까.

던 = 미국은 정치지도자들의 섹스문제에 대해 유별나게 히스테리적입니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정축재한 것이 증명된다면 탄핵을 당해야 하지만 그게 증명된 것도 아닌데 성적으로 적절치 못한 관계를 가졌다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건 우스꽝스러워요.

김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존 던 교수는…

1940년생인 던 교수는 72년부터 케임브리지대의 정치학교수. 미국의 예일대를 비롯해 일본.캐나다.인도.이탈리아.가나의 여러 대학에서 방문교수를 지냈다.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외국인 명예회원이고,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아태재단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그의 수많은 저서와 논문 중에서 특히 존 로크 연구, 근대혁명에 관한 연구, 정치이론에 관한 연구가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케임브리지에서 金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그는 아태재단 창립행사 때를 포함해 네차례 한국을 방문, 한국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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