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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강국’ 비전 누가 펼칠 것인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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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34면

1976년 용띠 해는 중국 대륙이 혼란 속에서 변화를 잉태한 시기였다. 1월에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7월엔 마오쩌둥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10대 원수 중 서열 1위)가 세상을 떴다. 탕산(唐山)대지진이란 천재지변이 닥치더니 9월엔 ‘마지막 황제’ 마오쩌둥이 서거했다. 한 해에 왕별 세 개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 제1차 천안문 사태(4월), 덩샤오핑의 실각·복권, 4인방 체포(10월) 같은 격동의 순간이 잇따랐다.

이양수 칼럼

덩샤오핑과 예젠잉·리셴녠 같은 주춧돌이 없었다면 중국은 다시 천하대란에 휩쓸렸을 것이다. 덩의 셋째 딸 덩룽은 저서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에서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고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격동의 시대는 새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에겐 새 시대를 꿰뚫어보는 비전이 있다. 그의 역량에 따라 역사와 운명이 갈린다. 덩샤오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4인방의 극좌 노선을 척결했다.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지상과제로 내걸었다. 마오쩌둥 격하 운동에 대해선 ‘마오 동지의 공은 7, 과는 3’이라고 묵살했다. 그는 78년 11월 싱가포르를 방문해 4인방이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비난하던 리콴유 당시 총리를 만났다. 나이 차가 19살이나 되는 두 거인의 대화는 스케일이 달랐다.

▶덩샤오핑: 58년 만에 왔는데 싱가포르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축하한다.
▶리콴유: 인구 250만의 소국일 뿐이다.
▶덩샤오핑:(한숨을 쉬며) 만일 상하이뿐이라면 나 역시 중국을 싱가포르처럼 빨리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중국 전체를 가지고 있다.

88년 9월 리콴유가 덩샤오핑을 만났을 때 관심은 샤오캉(小康:중류 정도의 안락한 생활 수준)에 쏠려 있었다. 덩은 “중국은 밖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싱가포르는 물론 심지어 남조선(South Korea)에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92년 한·중 수교조차 경제발전의 디딤돌로 생각했다는 방증이다.

덩샤오핑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싱가포르는 지금 1인당 소득 4만 달러를 넘는다. 다민족·다언어·다종교의 갈등을 이겨내고 인구 450만 명의 소(小)강국 모델이 됐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독재자’란 국제 사회의 비판을 묵살하면서 ‘일류 국가’ 비전을 관철시킨 리콴유의 리더십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유는 질서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원칙 아래 국가개혁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통합과 신뢰가 통치철학이었다.

동남아 각국도 지도자들이 흥망을 갈랐다. 60년대까지 잘나갔던 필리핀은 ‘절반의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경제는 파탄 직전으로 추락했다. 미얀마(버마)는 ‘불교 사회주의’에 이어 군사독재와 부패의 늪에 빠져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연금사태에서 보듯 미얀마는 더 이상 잃어버릴 희망조차 없다. 그런 점에서 수하르토의 30년 독재 시대를 극복한 인도네시아는 각광받는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개혁·개방과 부패 척결을 꿈꾸고 있다. 지난 5월 제주도 아세안포럼에서 만난 하비비센터 데위 안와르 박사는 “인도네시아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 중국과는 다른 발전 모델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소띠 해, 한반도는 33년 전 중국을 떠올릴 만큼 격동하고 있다. 2월엔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뒤이어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병설, 제2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정세는 뒤숭숭하다. 하지만 한국은 반 세기 동안 지도자 복(福)이 있는 나라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한 시대가 끝날 무렵 새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그 덕에 건국과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고 있다. 한두 명의 지도자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재 양성을 통한 ‘집단 지혜’를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85년 덩샤오핑(당시 81세)은 리콴유에게 “하늘이 무너져도 떠받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해 나간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중국의 비상을 가능케 한 핵심 경쟁력일지 모른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요즘 한반도 정세의 급변사태에 대비해 무얼 준비하고 있는가. 정파 이익을 벗어 던질 한국의 덩샤오핑, 한국의 리콴유는 없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나는 날, 새삼 ‘통일강국’의 비전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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