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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20.온정리의 구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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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금강산은 하도 금강산이어서 그 산의 한쪽씩 외금강.내금강으로 나눈다.

그것으로 모자라 바다에까지 해금강을 두었다.

해금강 바다 밑도 절경이므로 해저금강 혹은 수중금강이었다.

외금강 남쪽 일출.월출봉 아래로 신금강이 있다.

또 그것으로 모자랐던지 아예 금강산 줄기를 건너뛰어 남금강을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금강산 별칭에 앞서 만물상 너머 이 (裏) 만물상 저쪽으로 별금강이 있다.

도대체 금강산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일곱이나 되는 금강타령인가.

아직 금강산에 이르기 전인데도 금강산 권속이 아닐 수 없는 통천 총석정은 그 자체만으로 천연의 명품이었다.

그 총석정을 갖추고 바다로 나아간 땅과 저 아래 해금강의 땅으로 커다란 포옹을 이룬 그 일대는 이미 그 품안에 고성 장전의 빼어난 포구를 낳아 동해 어촌이 농촌을 겸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상고시대에 이어 고구려.신라의 땅이 되는 동안 바람찬 바닷가의 그 원시적인 삶에도 금강산의 아름다운 얼굴을 읽기 시작한 고대적 심미 (審美) 의 능력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나에게도 이어지는 듯하다.

신라 화랑들은 '멀리 안가는 데 없음' 을 그들의 순례 수칙 (守則) 으로 삼았다.

진평왕 때의 일이다.

세 화랑 거열.실처.보동 일행은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을 향했다.

삼국유사의 '풍악 (楓岳)' '개골 (皆骨)' 이 바로 그 산이다.

세 사람의 젊은이가 가는 금강산 산길이 어두워지자 별들이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별빛을 밝히며 길의 어둠을 비로 쓸 듯 쓸어주었고, 그 별빛들이 무던히도 진지한 것에 감동해 별 위에 떠있던 조각달도 아래로 내려가 함께 빛을 더했다.

고대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금강산을 순례하는 동안 심신의 수행에 익어 다시 한번 뭇 낭도를 이끌어가는 꽃같은 덕성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런 금강산을 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원산~금강산 1백8㎞. 한반도 중부 동해안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동해안은 최고의 풍경이었다.

언젠가 나는, 서해는 인생이고 동해는 예술이라고 말한 적이 있거니와 휴전선 이북의 동해안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그 완벽한 풍광에 어쩔 바를 몰랐다.

동해 쪽빛 바다의 영광은 이대로 속초.강릉.울진.포항 앞바다로 이어져 하나며 그대로 원산.흥남.신포.이원.김책.어대진.청진.나진, 지난 날의 웅기인 선봉, 그리하여 두만강구 서수라에 이어져 하나다.

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이마받이를 하며 봄.여름에는 멸치.고등어.정어리.방어.다랑어 따위가 바다가 좁다고 밀려들었고 겨울과 이듬해 해동머리까지는 꽁치.처어.대구.도루묵.오징어.임연수.양미리 등속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어찌 그뿐이랴. 이 바다를 두고 한반도 동해안의 모든 계곡과 내를 통해 만리 밖의 무대에서 모천 (母川) 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의 귀국은 또한 무엇이든가.

이런 동해야말로 그 파도더미의 동작도 서해의 그것과 좀 달랐다.

그 자신의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궁핍은 고전문학이건 근대문학이건 거의 바다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다의 체험이 없는 풍월을 노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점 동해에 대해 죄스러웠던지 이제야 하나 둘 노래가 있고 더듬더듬 이야기가 있다.

안변군을 바로 건너뛰어 통천군 지경의 고속화도로 해안에는 동정호 등 담수호들이 꿈처럼 바다를 이웃하고 있다.

그러다가 관동8경중 하나에 이른다.

짙푸른 바다와 모든 파도들이 그 힘을 다하는 바닷가의 백사장과 그 백사장 울짱이 되는 청정한 해송 솔밭,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억겁의 혈친 (血親) 인 푸른 하늘과 구름 몇점…. 이런 색채의 층층시하에서 나그네가 받아야 할 은혜는 너무 컸다.

시중호 앞바다였다.

시중호 물 밑의 진흙 감탕은 사람이나 짐승의 병을 낫게 해주는 특효가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국빈도 여기 와서 진흙구덩이 속에 벌거숭이를 파묻고 있었다 한다.

그 호숫가에 원산 금강원동기합영회사 조립공 노동자들이 놀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보니 조기천 작사 '휘파람' 을 아코디언 반주로 부르며 춤추었다.

금강산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내내 비가 와서 비를 맞고 옥류동에 갔다 오는 길이라 했다.

"그럼 금강산 제대로 못보았겠네. " "일없습니다. 언젠가 다시 와서 보면 됩니다. " 이런 짤막한 문답이 있었다. 그들도 어김없이 '통일이 되면…' 이라는 학습의 단서를 다는 것이었다.

시중호보다 시중호 앞바다에 더 심취했다.

원산에서 금강산 구읍리까지의 단선철도와의 동행은 때로는 구슬픈 것이었다.

철도는 녹슬어서 열차가 다닌지 사뭇 오래인 것 같았다.

간혹 간이역을 스치는데 그 쓸쓸한 역에는 역무원이 보이지 않았다.

장전항은 하나의 안마당이었다.

거기 마을 한쪽에 군함과 고깃배 몇척이 떠 있었다.

금강산 2㎞라는 표지가 나타났다.

이제 다 왔다.

마루턱에 올라 독야청청의 제일품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소나무 아래로 금강산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아! 내 탄성은 누구의 탄성인가.

통천군과 고성군 경계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어쩌면 내륙의 단발령에서 금강산 전모를 바라보는 것과 견주어질지 모른다.

이윽고 온정리였다.

관음연봉과 수정봉 산줄기 사이에 잘 길러낸 첫딸과도 같은 그 온천지대의 울창한 소나무 숲길에 접어들자 다시 한번 그곳의 조심스러운 손님이 됐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평생을 금강산만 바라보아야 하는 복된 형벌을 받고 있을 터였다.

외금강 온정리 금강산호텔 4층 객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수정봉은 그 절반은 구름이었다.

수정봉 곁의 바리봉이 제 모습을 가까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외금강은 내금강의 육체에 대해 그 헌걸찬 골체의 기상으로 사내답다.

산봉우리들은 예리한 창끝이거나 칼끝 송곳의 형상이 압도적이다.

그런 서슬과는 달리 수정봉과 바리봉은 이름 그대로 바릿대를 엎어놓은 듯 원만하다.

온천장에 갔다.

무취.무미.무색의 라돈 온천수는 펑펑 솟아오르지 않는 귀한 석간온천이었다.

온천 독탕에 맨몸을 푹 담그고 있노라니 금강산을 신선의 거처인 봉래산이라고 말한 것, 저 세상의 낙원도 금강산만 못하다고 말해오는 것에 한번쯤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금강산 1만2천봉은 아직 비구름 속에 있다.

나는 장풍 (掌風) 을 채워야 했다.

그래야 금강산 산신령의 장풍과 한판 겨루지 않겠는가.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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