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20대 80 사회' 정부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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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의 경제지표들은 경제위기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이른바 '20대 80의 사회' 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의 80%가 평균 - 9% 소득이 감소한 반면 상위 20%는 오히려 2.3% 증가했다. 구조조정의 비용도 하위 80%의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들의 조세부담률이 두 자릿수로 증가한 반면 상위 20%는 단지 3.6%만 증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실업률 증가는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지난 여름 이래 실업률은 7%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재벌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내년 상반기부터는 9%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대폭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내년 노동정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이 중앙노조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의 조직률은 12%대라는 사상 최저수준으로 저하돼 노동자들의 요구나 이에 대한 수용이 제도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기가 더욱 어렵다.

더욱이 전체 실업자중 비조직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훨씬 상회하지만 이들을 노사관계의 틀로 포용하려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노동문제와 실업문제가 이렇듯 제도권 밖으로 내몰리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안정에 위험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구조조정 이후 노동정책에 대한 어떤 개혁성이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연초에 정부는 노사정 (勞使政) 타협을 통해 정리해고제와 재벌개혁.노동권 신장 등에서 상호교환에 합의했다. 이같은 노사정위원회의 출범과 사회협약의 체결은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강화시켜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이같은 기대를 갖기는 어렵다. 교원노조 법제화, 실업자의 노조가입문제 등과 같은 노사정의 합의사항조차 정부여당내, 그리고 정부부처들간의 갈등, 야당의 반대로 차일피일 뒤로 미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노사정위원회가 제기능을 못하고 구조조정의 장식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강하다. 노동권 신장을 위한 조치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가운데 정리해고는 엄혹한 경제논리에 따라 철저히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우리의 노동시장에서는 고용.복지.노조활동 등의 부담을 개별기업이 떠맡아 왔다. 지난날 정부는 경제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개입해 왔지만 노동시장에 대해서만큼은 정책의 부재라 할 정도로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정리해고제의 조기도입으로 그나마 그동안 사내복지를 제공하는 바탕이 됐던 '유교적 노사가족주의' 를 포기하고 정리해고중심의 고용조정. 임금삭감. 복지축소 등으로 비용감축에 몰두해 왔다.

이에 따라 개별기업 중심의 노동운동도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구질서가 기능하지 못하고 허물어지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노사관계의 틀을 형성할 정부의 정책이나 컨센서스도 없다.

정부가 중심이 돼 새로운 노사관계의 틀을 짜고, 실업대책을 마련하며 사회복지제도를 확충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됐음에도 불구하고 실업자들에게 최장 6개월의 고용보험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대책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에 따른 전환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협력적 신노사문화를 구축하는 방도는 정부가 노사정위를 더 적극적 차원에서 활용하는 것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합의사항을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더 나아가 노사정위를 정리해고에 따른 노동계 불만 무마의 소극적 차원을 넘어 노사관계의 고비용구조를 개혁하는 틀로 삼아야 한다. 노사정위를 전국적 수준의 노사정 교섭체제로 강화함으로써 기존의 분배중심 기업별 노동체제를 참여중심의 노사정 체제로 개혁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정부의 적극적 이니셔티브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처방에 대해 한편에서는 국가의 과도한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원리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노사관계를 포함해 모든 것을 시장의 기능에 내맡겨 두면 모두 잘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구조조정은 시장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그러나 노사관계는 이같은 시장논리로 해결하기 어려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실업문제나 노동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통해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적절하게 배합해 좋은 혼합체제를 창출해내는 일이다. 한 나라의 경제체제는 산업.금융.노동 등 서로 다른 영역들을 배합해 효율성을 만들어내는 부분체제 (partial regime) 의 종합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화를 통해 폐기해야 할 것은 국가의 역할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잘못된 역할이라 하겠다. [최장집 고려대교수·정책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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