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유로'를 향해 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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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령 한국의 원화, 일본의 엔화, 중국의 위안화가 퇴출되고 세나라가 같은 돈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꿈같은 이야기다.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 13개국이나 15개국이 단일통화를 쓴다면 그것은 더욱 신기한 일일 것이다.

나라는 달라도 쓰는 돈이 같으면 여행하기 편하고 국제거래에 드는 비용이 크게 절약된다.

국제관계도 안정되고 금융위기도 없을 것이다.

이런 꿈같은 일이 앞으로 2주일이면 유럽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단일통화 유로 (Euro) 를 사용하는 유럽통화동맹 (EMU) 의 15개국중 11개국에서 99년 1월 1일 유로가 법정통화로 출범하는 것이다.

유로는 일단은 실체없는 문서상의 통화로 비현금 거래에만 사용되지만 국공채 발행과 정부간 거래에는 의무적으로 유로를 사용해야 한다.

기업과 개인도 신용카드와 수표와 전자현금을 유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다가 2002년 각국의 통화는 완전히 회수되고 유로의 지폐와 동전만이 2억9천만 유로권 사람들의 돈이 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의 파운드로부터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넘겨받은 달러는 마침내 독점적인 '통화 패권' 을 포기하고 유로와 함께 통화의 양극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유로의 출범은 유럽을 하나의 정치와 경제단위로 통일하는데 큰 이정표를 세우는 문명사적 (文明史的) 인 사건이다.

서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문화를 계승해 지금의 동서 유럽과 발틱연안 일대에 공통의 문화권을 만든 유럽사람들의 중세유럽에 대한 짙은 향수가 단일통화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유럽의 교역총액은 3조3천억달러로 미국의 1조4천억달러보다 많아 유로는 몇년 안에 결제수단으로 정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세계 중앙은행들은 유로를 보유하기 위해 최소 5백억에서 최고 3천억의 달러를 매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경제의 달러 의존도가 줄고,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도 약화가 예상된다.

99년이 아니라 97년 이전에 유로가 등장했다면 아시아 금융위기의 양상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1920년대 유럽의 경쟁적인 환율인하가 2차대전을 촉발했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불안을 가장 불안해 한다.

특히 프랑스가 경제대국이 된 통일 독일을 정치.군사적으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 경제적으로는 유럽 단일시장과 단일통화라는 '공동의 집' 에 가두어 마르크의 '통화 패권' 에서 자유롭기를 바란 것이 유로의 중요한 추진력이 됐다.

유로 참가국들은 재정적자가 국민총생산 (GNP) 의 3% 이내여야 한다는 자격조건을 갖추기 위해 지난 수년동안 사회복지비를 줄이고, 공무원 봉급을 깎고, 금과 국영기업을 팔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고도의 구조조정이 돼 유럽경제를 회생시키고 있다.

그래서 유로의 앞날에 회의적이던 미국이 이제는 유로 경계론으로 돌았다.

지난 3일 유로권의 11개국이 금리를 일제히 3% 수준으로 내린 것은 내년 1월 이후 유럽중앙은행 (ECB) 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가 될 공동의 금융정책이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둔 ECB는 참가국들의 통화주권을 넘겨받아 공동의 통화정책을 시행한다.

단일 금리가 그중의 하나다.

독일의 연방은행을 모델로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이 보장된 ECB를 견제하는 유일한 기구는 유로경제권의 재정정책을 담당할 회원국 재무장관회의 (Euro - X) 뿐이다.

유로권에서는 벌써 기업들의 생산기지 이전과 인수.합병이 활발하다.

세제 (稅制) 와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의 수렴과 통합이 가속화되고, 거대 금융시장이 역사적인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세기말을 상징하고, 세계의 경제지도를 다시 그리는 이런 지각변동이 우리 기업과 은행들이 생사 (生死) 를 건 구조조정에 여념이 없는 시기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낙제점을 면치 못한 우리의 세계화 수준으로 어떻게 이 도전에 대처할 것인가.

국민 모두와 정부와 기업들은 빨리 'IMF 설거지' 를 끝내고 유로를 향해 뛰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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