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위원회가 춤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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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논설위원을 오래 한 탓인지 각종 위원회 위원 감투도 꽤 많이 써 왔다.

교육개혁위원.민족문화발전위원.공연윤리위원.노사개혁자문위원…등 지금은 이름도 잊어먹은 위원회에 소속된 적도 있었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 오라는대로 따라간 탓도 있겠지만 당시로는 위원직을 수락한 나름대로의 명분도 있었다.

관심있는 위원회에 참여하면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참여자들이 대체로 각계 명망가들이어서 이 분들 토론 중에서 뭔가 배운다는 소득도 있었다.

권위주의 정치가 쇠락하면서 민의가 분출하고 이익집단간 대결이 팽팽히 맞서면서 민의수렴과 합의도출을 위한 민간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상시적.일시적 위원회가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문민정부 기치를 내건 김영삼 (金泳三) 정부 때는 가위 위원회 천국이라 할만큼 각종 위원회의 출현과 소멸이 잦았다.

케이블TV를 만든다 하면 먼저 위원회가 구성되고 뒤이어 진입을 심사하는 심사위원회가 구성돼 마치 정부는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민간전문가들이 새 매체를 공정하게 만들어내는 듯 연출을 하기도 했다.

새 정부 들어서도 이런 형식의 위원회는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린벨트를 푼다는 전제 아래 민간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었다.

말도 많은 통합방송법을 유보하면서 민간인들로 구성된 방송개혁위원회를 한시적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여기에 제2건국위원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지방조직과 연계해 국민의식 개혁운동을 벌인다는 계획까지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정부는 이런 형식의 위원회를 애써 만들어 내는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정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경우에 따라선 정부의 보호막.들러리로 민간위원회를 내세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의도도 숨겨 있다고 본다.

형태도 여러가지다.

먼저 '면피형' 을 보자. 이해집단간 첨예하게 대립되는 계쟁점을 해결하려면 어느 한쪽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피해본 쪽의 원망이 정부에 쏠리지 않고 위원회로 돌아간다.

위원회가 피뢰침.방탄조끼 역할을 맡는다.

그린벨트를 풀어야 한다는 주민들의 절박한 호소와 자연환경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자연보호론자간의 쟁점은 어떤 이론이나 찬반투표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통합방송법을 둘러싸고 업자간 이해, 정부부처간 갈등, 여야간 힘겨루기, 방송종사자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4년간 토론해 온 방송법 개정을 유보하고 정부여당이 방송개혁위원회 구성으로 풀겠다는 발상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해결의 방향은 정부가 정해 놓고 위원회에 넘겨 비난의 화살을 피하자는 계획된 의도가 면피론적 위원회 구성으로 나타난다.

'들러리형' 이 있다.

명망있는 사회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라지만 위원 개개인으로선 이해득실을 정확히 따질만큼 현실파악도 어렵고 전문성.책임성도 떨어진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게 정부 주도의 이미 계획된 안이다.

소수 반대의견이 있어도 원안대로 가는 게 위원회의 운영방식이다.

북치고 장구쳐봤자 결론은 이미 나 있다.

그 다음 '바람몰이식' 위원회다.

정부 정책방향에 필요한 무드를 조성하고 확산시킬 운동을 바람몰이식으로 전개하는 위원회 형식이다.

대체로 범국민운동 운운하는 위원회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지금 추진중인 제2건국위원회의 취지나 선언문을 보면 다분히 이런 부류에 속할 위험이 있기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고 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2건국위의 문제점을 설파했기 때문에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다.

이 위원회가 과연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참여민주주의, 민주적 시장경제, 보편적 세계주의, 창조적 지식기반국가, 협력적 신노사문화, 화해와 교류의 남북관계라는 거창한 국정 6대과제를 앞장서 추진할 수 있겠는가.

선의로 해석해도 잘 돼야 권위주의 시절의 새마을운동형 조직인데 21세기 문전에서 웬 새마을운동인가.

민주시민사회 수립이 이 정부 최대 과제인데 정부가 국민의식을 관변단체 주도로 개조해? 이미 이런 정책과제 수행을 위해 관련 분야의 정부 주도 개혁이 추진 중이고 이를 위한 숱한 위원회가 조직돼 있는데 또 무슨 옥상옥의 위원회인가.

위원회 존재가 민간전문가들의 여론수렴과 합의도출이라는 피뢰침형 순기능이라면 좋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들러리.바람몰이형 역기능으로 춤출 때 새로운 형태의 국민 중우화 (衆愚化) 작업이 될 수 있고 위원회 망국론이라는 비판도 면하기 어렵게 된다.

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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