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6> 후스와 장제스<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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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대만의 한 회의에서 총통 장제스(왼쪽)에게 치사를 청하는 후스. 김명호 제공

후스(胡適)는 중국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대놓고 말들은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 몰라라 하는 얌체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장제스(蔣介石)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왕래가 빈번했다. 최고 통치권자와 접촉하는 횟수가 많다 보니 인격의 독립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야 한다며 후에게 의혹과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지식인이 허다했다. 엉터리들일수록 정도가 심했다.

후스는 1925년 가을 “장제스는 공산당과 같은 패거리가 아니다. 상인과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믿을 만한 친구에게 들은 후부터 장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장은 한동안 소련에 머문 적이 있고 그의 주변에는 소련인 군사고문이 많았다. 소련의 주선으로 국공이 합작했던 시절이고, 소련의 지원으로 설립된 군관학교의 교장이다 보니 후가 장을 소련의 대리인 정도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후가 34세, 장은 38세 때였다.

2년 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북벌 중이던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켰다. 성공한 쿠데타였다.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국공합작을 파열시켰다. 미국에 머무르던 후스는 일본을 거쳐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제자 가오제강(高<9821>剛)이 “북벌군 중 아는 장교가 있어서 이들의 연회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국민당은 기치가 선명하고 조직을 갖춘 정당이다”며 “선생은 문학혁명에 포문을 열었고 사상혁명을 제창했다.

군벌정부에 참여했고 고궁을 황실로부터 몰수하는 일에 반대한 적이 있다. 북벌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는 마당에 계속 정치적인 발언을 한다면 민중의 적으로 몰릴 소지가 다분하다. 민중은 관용을 베풀 줄 모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당에 입당하는 길밖에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국공과 북방의 장쉐량이 천하를 완전히 3분했다. 총성이 그치지 않고 감옥은 만원이다. 언론의 자유가 불가능하다. 툭 하면 의견을 발표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우려된다. 일본에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나 수집하며 기회를 봐라”는 친구도 있었다. 후스는 이들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일본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신문에 보도된 관련 기사들을 꼼꼼히 살핀 후 군사정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는 판단이 들자 짐을 꾸렸다. 귀국한 후스는 정치와 거리를 뒀다.

1928년 10월 국민당은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쑨원(孫文) 사상의 신성화와 절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인권 보장 명령’을 반포했다. 인권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명기하지 않은 명령서였다. 후스는 자신의 금기를 깼다. 인권과 법치의 결핍을 비난하는 문장을 연달아 발표했다. 국부 쑨원의 ‘행이지난’설(行易知難說:행하기는 쉽지만 알기는 힘들다는 주장)을 불학무식한 군인들에게 호신부를 채워준 꼴이라며 비판했다. 무지렁이 세 명이 한 사람의 제갈량보다 낫다며 헌법의 제정이 불가능하다면 임시약법이라도 서둘러 제정해 인치(人治)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민당 상하이 시당(市黨)은 후스의 체포를 중앙에 건의했다. 국민정부는 중국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국민당의 이념과 국부의 학설을 오해해 불필요한 토론을 유발시키지 말아 달라는 경고 형식의 서한을 후에게 발송해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래도 상하이 시당은 후를 들들 볶아 중국공학 교장 직을 사퇴하고 상하이를 떠나게 했다. 이 와중에 장제스는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행동을 취했다. 국민당 원로 후한민(胡漢民)이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국민회의를 소집해 약법을 제정하려 했다.

1930년 칭화대는 후스를 포함한 세 사람의 명단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중 한 사람을 교장으로 지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장제스는 “후스는 반당분자다. 교장으로 내보낼 수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식을 들은 후는 “장제스가 내게 감투를 하나 씌웠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11월 30일 우한대 개교 4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후스는 한커우에 장제스가 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우한과 한커우는 강 하나 사이였다.

장은 무조건 찾아온 초면의 후를 반갑게 맞이했다. 후스는 식전이었다. 이날 장제스는 저녁을 두 번 먹었다. 다음 날 비서를 보내 후를 만찬에 초청했다. 후는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일찍 자리를 떴다. “군주의 지식과 능력은 한계가 있다. 전국의 이목을 자신의 이목으로 알고, 전국의 수족을 자신의 수족으로 알고 의지해야 한다. 대권을 장악한 사람이 자신에 넘치고 능력을 과신하면 국민에게 재난을 안겨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이었다. 12월 2일에도 장제스는 후스를 초청했다. 후는 선약이 있어 늦게 갔다. 장은 교육제도의 개혁과 학풍의 정돈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후는 “교육제도는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 교육의 붕괴는 제도와 무관하다. 전문가의 손을 거친 훌륭한 제도지만 시행에 실패했다. 개혁이다 뭐다 하며 자꾸 뜯어 고치다 보니 엉망이 됐다. 학풍도 마찬가지다. 교장이라는 사람들이 인심을 얻지 못하고 관직을 탐내는 교원이 많다. 선발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는 죄가 없다”며 머뭇거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저서를 후스에게 선물했다. 책을 펼쳐본 후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생각을 수용한 흔적이 도처에 엿보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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