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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버킷 리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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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 ‘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이야기다. 버킷 리스트는 한국말로 하면 ‘인생 마지막 욕망의 목록’ 정도가 될까.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마치 국민이 모르는 사이 버킷 리스트라도 작성해 놓은 듯하다. DJ 위중이라는 급변사태가 생기자 리스트가 세상에 나오는 것 같다. 다행히 리스트가 대결이나 마지막 승부가 아니라 화해와 위로여서 보는 이의 마음이 편하다.

전직 대통령의 버킷 리스트가 앞으로 무엇을 더 보여줄지는 알 수 없다. 워낙 극적으로 돌아가는 게 한국 정치라 국민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특히 상상해볼 만한 것은 전두환·노태우의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다. 묘지에는 608명이 안장되어 있는데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5·18~27) 때 피살됐거나 그때 부상을 입었다가 나중에 숨진 이들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서 묘소를 참배하지 않은 이는 5공의 주역 전·노 2인뿐이다. 두 사람의 묘지 참배가 중요한 건 한국 사회가 아직도 1980년의 유혈(流血) 갈등을 치유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참배하지 않은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사회통념과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핵심 측근은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 등에 대해 전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5·18 당시 전두환 장군은 보안사령관이어서 진압병력의 동원이나 발포에 관련이 없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980년 사태에서 전두환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책임을 간과하는 미시적인 형식논리다.

1980년은 지금 전직 대통령들 사이에 얽혀 있는 갈등의 발원지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권력장악이 없었더라면 DJ 체포도, 광주의 봉기도 없었을 것이다. 광주의 유혈이 없었더라면 YS가 12·12 쿠데타를 재판에 회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가 이례적으로 기소된 것은 광주 유혈이라는 원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재판이 아니라면 전·노의 사형선고도 없었을 것이고 전·노와 YS의 갈등도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군부 세력이 없었더라면 YS와 DJ의 경쟁은 훨씬 홀가분했을 것이다. 후보 단일화의 부담 없이 두 사람은 경쟁을 통해 차례로 대통령을 이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현대사 갈등의 축에 1980년이 있고, 그 가운데에 전두환이 있다.

DJ 병실을 보면 29년 만에 1980년이 돌아온 것 같다. 1980년은 여전히 상처 입은 모습으로 소곤거리고 있다. “나를 치료해 놓지 않고는 당신들은 전진할 수 없다.” 전두환은 그 소리를 들었을까. 5·18의 직책이 보안사령관이든 아니면 특전사령관이든 전두환은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의 책임자다. 그는 정치적으로 가해세력의 리더이자 총책임자였다. 그런 책임자가 묘소에 가야 피해자들의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전두환은 유혈로 집권했지만 1987년 6·29 선언의 결단으로 또 다른 피는 막았다. 국민에 대한 항복이었지만 어쨌든 역사 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국가가 그의 결단을 다시 한번 기다리고 있다. 전두환의 버킷 리스트에 광주가 실릴 것인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