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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박 차장 vs 박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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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드라마 ‘스타일’에서도 역시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광고주를 끌어들여, 거기서 편집장이 얼마나 받아먹은 거야?”란 대사가 오갔던 3회. 오프라인 호시절에도 광고를 게재하게 만들고 욕먹은 편집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지금 같은 불경기에 1, 2등 잡지라고 편집장 마음대로 광고주를 선택하고 게다가 돈까지 받다니. 얼마를 쓴 거면 몰라도 이건 아무래도 요즘 버전은 아니다.

“오늘부터 마감이야. 각 잡고, 깃 세워.” 마감을 앞둔 편집부에 던진 박 차장(김혜수 분)의 이 말은 사족 없이 깔끔해서 써먹을 요량으로 메모를 해두긴 했다. 하지만 현실의 박 차장은 “첫날인데 저녁 같이 먹고 시작할까” 정도로 애교 있게 외치는 쪽일 것이다. 속은 까맣게 타도 겉은 부드러운 게 현실의 박 차장들이건만 드라마의 박 차장은 부럽도록 당당하다.

또 하나. “소신 좀 지키세요. 이러니까 만년 2등 소리를 듣죠.” 상사인 편집장에게 이런 말을 날릴 수 있는 강심장 박 차장은 없다. 물론 역학관계상 넘버 1과 넘버 2가 찰떡궁합이긴 힘들지만 현실의 박 차장은 대개 10여 명 에디터의 맏언니 노릇을 하고 있다. 후배의 섭외를 도와주고, 편집장의 결정을 에디터들에게 이해시키기도 한다. 둘의 관계는 간혹 날이 서기도 하지만 결국 박 차장은 편집장의 오른팔인 셈이다.

쓴 김에 더 떠올리면 “‘스타일’이 네 일기장이야? 쉬고 싶으면 영원히 쉬어.” 이 장면. 잡지는 오랜 세월 다져온 그 잡지만의 고유한 맥락, 기사 가이드라인 등이 있어 간혹 에디터 훈련용으로 ‘일기장 운운’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편집장은 대개 “드릴 말씀 있는데 시간 있으세요”라는 면담 요청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만둔단 말만 아니면 시간 많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쿨한 척 달래가며 대응하는 새가슴 편집장이 열에 아홉인 것을, 무슨 배짱으로 영원히 쉬라는 말을 날린단 말인가.

“인터뷰 안 하겠다”는 사람을 섭외해 멋진 화보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과장과 희화화를 거쳤지만 대체로 맞다. 전화와 메일은 기본이고, ‘시안을 들고’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기도 한다.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설득해 함께 등장시키는 것 또한 익숙한 수법. 인터뷰이의 ‘오케이’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영혼을 팔아서라도’ 섭외하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에지 있게 해” “머리에 쥐 난다” 같은 대사는 잡지사 언어에 가까워 현장감이 있다.

그나저나 중학생 딸아이 친구들이 잡지기자를 꿈꾼다는데 한 달에 일주일은 ‘사무실 소파의 노숙자’가 되고, 연봉도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긴 회색 파티션에 온갖 잡지와 시안으로 어지러운 진짜 잡지사 풍경이 드라마에 나왔어 봐. 더 화나지.

이숙은 ‘HEREN’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