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막걸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보드카는 어느 나라 술일까. 스카치 위스키의 고향이 스코틀랜드이고, 사케 하면 일본이듯 보드카라면 러시아가 떠오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정답’은 공짜가 아니었다.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에 따르면 1977년 유럽과 미국의 주류회사들이 소련 정부가 생산한 보드카에는 보드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자신들이 보드카를 상품화한 것(1918년)이 소련 정부(1923년)보다 5년 빠르므로 배타적 우선권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수백 년 전부터 보드카를 마셔온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선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얘기였으므로 역사책 한번 들추는 것으로 이 문제는 가볍게 해결됐다. 그러나 같은 1977년 폴란드 정부가 “보드카는 16세기 폴란드에서 발명됐으며, 다른 나라는 보드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자 느긋하던 소련 정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자료 조사팀이 발족돼 고문서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5년간의 분쟁(?) 끝에 1982년 러시아는 ‘보드카의 조국’으로 공인받았고 보드카의 출생 연도도 1446년으로 확립됐다.

이런 논쟁은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한국이 자랑하는 발효식품 김치의 국제 공식 표기가 kimchi 아닌 kimuchi가 될 뻔한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kimchi’를 공식 표기로 인정하면서 이 분쟁은 끝났다.

최근에는 서민의 술 막걸리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막걸리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며 일본의 대형 주류업체들이 ‘일본산 막걸리’를 내놓을 것이란 얘기에 국내 주조사들이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 아닌 맛코리(マッコリ)에 시장을 빼앗기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등장했다.

물론 일련의 사태로 인해 막걸리의 국적이 흔들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쌀로 만든 탁주가 한국만의 술은 아니다. 일본에도 니고리자케(にごり酒)가 있고 중국도 일찍부터 요(<91AA>)를 만들어 마셨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가 막걸리의 우수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욕심을 내자면 ‘막걸리는 본래 한국 술’이란 것만 인정받는 걸로는 부족하다. 이미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보드카 생산국 자리를 미국에 내준 지 오래다. 주류업계가 분발해 상품으로도 ‘한국산 막걸리’의 인기가 죽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송원섭 JES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