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가수서 ‘렌트’의 전설된 그 “인생은 렌트할 수 없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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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렌트’는 한때 마약중독자였던 록 뮤지션 로저와 에이즈에 걸린 밤무대 댄서 미미의 안타까운 사랑으로 스토리를 엮어낸다. ‘로저’역의 애덤 파스칼(앞)과 ‘미미’역의 렉시 로슨. [사진작가 조앤 마르커스 제공]

수십편의 작품을 해도, 수십년 무대에 올라도, 하나로만 기억되는 배우가 있다. 애덤 파스칼(39)이 그렇다. 1996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충격을 가한 뮤지컬 ‘렌트(Rent)’에서 주인공 로저를 연기한 그는,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또한 수십명의 다른 배우가 로저를 거쳐갔음에도 여전히 ‘로저=애덤 파스칼’로만 팬들의 망막에 새겨져 있다. ‘렌트’의 신화는 어쩌면 히로인 애덤 파스칼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릴 때까지 ‘렌트’는 12년간 지칠 줄 모르고 달려왔다. 이후 월드투어가 이어졌고, 거기에 오리지널 멤버인 그의 동참은 당연했다. 현재 일본 도쿄 아카사카 공연장 무대에 오르고 있는 그를 일본 현지에서 직접 만났다.

#운명처럼 다가온 배역

어느새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지만, 파스칼의 에너지는 폭발적이었다. 180㎝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 금발의 수려한 외모. 그건 작품 속 가난한 로커의 이미지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조화를 자연스럽게 만든 게 파스칼이었다. 음색 또한 그렇다. 그의 목소리엔 그룹 시카고의 리드 싱어 피터 세트라와 같은 도시적 감수성이, 브라이언 아담스의 짙은 호소력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애잔하면서도 거칠고, 음울하면서도 경쾌한 작품의 색깔은 파스칼의 모습과 비슷했다.

‘렌트’는 그의 뮤지컬 데뷔작이다. 이전까지 ‘뮤트’라는 전혀 이름없는 밴드의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어떻게 발탁됐을까. “친구가 작품과 배역을 내게 알려줬다. 조건은 록음악을 하면서, 무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딱 나다’란 생각에 무심코 오디션에 응했다. 그런데 덜컥 됐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아마 운명이었던 모양”이란 말이 이어졌다.

‘렌트’가 전설이 된 또 다른 이유는 요절한 천재 작곡가 조너선 라슨 때문이다. 그는 작품이 처음 올라가는 당일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숙소에서 발견됐다. 대동맥 혈전이라는 병이었고, 나이는 고작 서른다섯살이었다. 파스칼은 “눈보라가 치던 날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와 조너선과 눈싸움을 벌인 기억이 생생하다”며 “그의 혼이 아직도 무대를 감싸고 있다”고 전했다.

#배우들의 로망

로저는 특히 배우들의 로망이다. 한국 남자 뮤지컬 배우 33명을 대상으로 ‘20대에 하고 싶은 배역’을 설문 조사한 결과, ‘렌트’의 로저가 1위로 뽑혔고, 역대 ‘로저’중 최고의 배우를 뽑아달라는 설문에서도 애덤 파스칼이 선정됐다(본지 2008년 12월1일자 16면). 파스칼은 “척박한 세상에 저항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몸부림치는 건, 방황하는 20대의 모습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역설적으로 파스칼은 여전히 ‘로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건 행운일까, 불운일까. 그는 “나이가 들면서 다른 느낌의, 다른 깊이의 ‘로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라고 답했다.

작품에서 로저는 “죽기 전 내 영혼의 노래를 찾겠다”며 절규한다. 현실의 그에게 ‘영혼의 노래’는 무얼까. 그는 즉각 “내 아이들”이라고 답했다. 그에겐 레논(7)과 몬테(5) 두 아들이 있다. “내 아버지가 나를 그저 지켜봐 주셨듯,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며 “인생은 빌릴(Rent) 수 없다. 인생의 주인은 본인 자신”이라고 말했다. 20대의 거칠던 ‘로저’는 13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따뜻한 아버지가 돼 있었다.

▶애덤 파스칼이 출연하는 뮤지컬 ‘렌트’의 한국 공연은 9월8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다. 1544-1681.

도쿄=최민우 기자

◆뮤지컬 ‘렌트’=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시킨 뮤지컬. 원작의 1830년대 파리 뒷골목은 199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로 옮겨졌다. 마약과 에이즈, 동성애라는 파격적 소재와 사회성 짙은 스토리, 록 콘서트를 방불케하는 형식미로 뮤지컬 문법을 새로 썼다. 브로드웨이 유명 작가 제프 위티는 “‘렌트’가 없었다면 ‘에비뉴 큐’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같은 실험성 높은 작품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96년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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