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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 찾아서] 천안 병천면 가전리 김시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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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김남응 안동김씨 중앙회장이 김시민 장군이 이무기를 잡았다는 ‘사사처(射蛇處)’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左) 건너편 논이 이무기가 살았다는 연못 터. 사사처 비 옆의 구암 밑 부분에 ‘金氏世居’ 라고 쓰여 있다.(右)

유배 온 부친이 정착 안동 김씨 세거지로 독서광 김득신이 손자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을 말한다.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 450여 년 전 일이다. 천안 병천면 가전리 백전(栢田,잦밭)부락 입구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 곳에 큰 이무기(물속에 사는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수시로 출몰해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을 해쳤다. 이 마을 9살 소년이 퇴치할 방도를 궁리했다. 동네 아이들을 마을 입구 큰 돌(龜岩)위에 올려 세워 그 그림자로 연못의 이무기를 유인했다. 이무기가 모습을 들어내자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를 얹어 내리 예닐곱 발을 명중시켜 뱀을 잡았는데…. 그 피가 며칠간 병천천을 붉게 물들게 했다.

# 같은 장소, 비슷한 시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한 아이가 있었다. 병정놀이를 좋아해 언제나 대장이 돼 또래들을 지휘하였다.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천안군수 행차가 있어 수행원들이 길을 비키라 했다. 그러자 이 소년은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수가 말에서 내려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고 길을 비껴 지나갔다.

임진왜란 3대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충무공 김시민장군(1544~1592)의 어릴 적 일화다.

병천면 가전리 일대는 안동 김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세거지다. 그 시초는 김시민 장군의 부친 구암 김충갑(1515~1575)때 부터 였다. 김시민 장군 생가지가 있는 가전2리(백전마을) 입구엔 ‘구암’(거북모양 바위)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옆에 ‘김씨세거’(金氏世居) 글씨가 새겨져 있있다. 안동 김씨 중앙종친회장 김남응(74·병천리)씨는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가전2리뿐아니라 가전1리(새말), 가전3리(돌모루) 에는 안동 김씨 많이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다른 성씨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회상했다. 아우내문화원장과 서울 동성중 교장을 역임한 김씨는 이곳 잦밭에서 태어났다.

김시민 장군의 후손으론 아들 전 경상도감사 김치와 손자 김득신이 유명한다.

▶김충갑(金忠甲)=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우 제갑과 더불어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다. 1543년(중종38년)에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고 1546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지평(持坪, 사헌부 정5품), 헌납(獻納, 사간원 정5품) 등을 거쳤다. 을사사화때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1547년(명종2년) 서청주(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21년간 유배됐다. 그 후 안악군수가 지냈고 후일 아들 김시민 장군의 공훈으로 좌찬성에 추증됐다. 첫 부인은 1544년 사망했고, 유배지와 가까운 곳인 병천 잣밭에 사는 창평이씨 참봉 이성춘의 무남독녀 딸과 혼인했다. 이것이 그후 안동 김씨가 이 곳에 대대로 살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06년 국민 성금으로 구입해 일본에서 들여 온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2등 세번째 김시민 장군 이름이 보인다. 진주국립박물관 전시 중. [중앙포토]


▶김시민(金時敏)=1578년(선조1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 병기제조창)에 있다가 1581년 부평부사가 됐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가 난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이 됐다. 그러나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사직했다.

1591년(선조24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사한 진주목사을 대신해 성지를 수축해 진주성을 지켰다. 이후 곽재우 등 의병장들과 합세해 여러 차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고성과 창원 등지의 성을 회복한 공로로 8월 진주목사에 임명됐다. 9월에는 왜장을 사로잡는 전공도 세웠다.

10월 또다시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했다. 그는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적장 하세가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승리를 거두었다. 진주 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휘를 그가 이끌었으며, 곽재우·최경회 등 의병장들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해 도움을 줬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동문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은 적의 탄환을 이마에 맞아 전사했다.

그는 죽기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됐나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순국한 다음이었다. 1604년 선무공신 2등과 영의정에 봉해졌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공(忠武公)이었다. 2006년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선무공신첩을 국민들 성금으로 다시 사 국내로 들여와 진주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백곡 김득신(金得臣,1604~1684)=김시민의 손자로 시인의 명성을 얻었다. 아들 없이 순절한 김시민 장군의 양자로 아버지 김치(金緻, 1577~1625)가 가게돼 김 장군의 대를 잇게 됐다. 백곡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로 서서히 문명(文名)을 떨쳤다.

1642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시에 능해 오언·칠언 절구를 잘 지었다. 당대 일류 문장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대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다. 1662년(58세) 뒤늦게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일어날 사화(士禍)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내려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효종이 그의 ‘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백곡은 『백이전(伯夷傳)』을 1억1만3000번을 읽어 그의 서재 이름도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백곡이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었다. 그런데 신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머리가 좋지 않았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점 조차 끊어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엄청난 노력가로 끝내 최고의 문객 지위에 올랐다. 『백곡집』에는 병천, 목천에 대한 글도 많이 나온다. 북면 연춘리 ‘복구정(伏龜亭)’은 그가 즐겨 시를 짓던 곳으로 ‘구정문적(龜亭聞笛,구정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등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안동 김씨 지역인사(항렬 순)

·김천묵 전 농협 천안지부장
·김상무 전 천안공고교장·천안삼락회장
·김남응 전 동성중 교장, 안동김씨 중앙회장
·김천응 전 병천면장
·김태응 풍세초등학교장
·김범응 상명대 천안캠퍼스 사무총장

·김장응 김앤장치과(쌍용동) 원장
·김일회 전 천안지원 서기관, 법무사
·김지회 천안 안동김씨 청년종친회장, 법무사
·김태현 전 천안교육장, 한국전례원 충남지원장
·김용학 용정초등학교 교감


독서광 김득신의 일화

1.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 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가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다. 첫날밤도 예외없이 신랑은 신부에겐 눈길을 주지않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다. 백곡이 경대 밑에서 가까스로 발견한 책은 책력(冊曆, 요즘의 달력). 밤새도록 그 책을 읽고 또 읽은 백곡이 뱉은 한마디.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지.”

2. 백곡보다 먼저 딸이 죽었는데,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 책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중점 단속항목은 중앙선 침범, 역주행, 신호위반, 주정차금지 구역에서 대기, 구조변경 승인없는 경광등 부착, 수건 등을 이용하여 고의로 번호판을 가리는 행위, 경찰무전의 불법도청행위 등이다



용호(龍湖) 김득신 지음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고목이 찬 구름 속에 잠기니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가을 산엔 소낙비가 들이치네.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날 저문 강 풍랑이 일자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어부가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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