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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르윈스키여 안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번 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곰곰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은 선거에서 사실상 패한 미 공화당만이 아니다.

지구촌 정보혁명의 물결 속에서 치러지는 어느 한 나라의 선거는 마치 거대한 금융자본이 하룻밤새 지구를 한바퀴 돌듯 금세 세계질서와 쌍방향의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올해 치러진 일본의 참의원 선거, 독일의 총선이 다 그랬다.

세계의 이목과 여론도 이들의 선거에 대해 곧바로 적절한 평가를 내리곤 했다.

일본 참의원 선거에는 '식은 피자' 를 구워낸 셈이라는 소리가 따라 붙었고, 독일 총선은 '제3의 길' 이란 면에서 주목받았다.

세계적 경제위기 와중에 뚜껑이 열렸던 일본 참의원 선거는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 내각에 대한 불신임으로 나타났다.

개혁다운 개혁을 통한 경제 되살리기를 촉구하는 일본 국민들의 심판이었 다.

그러나 그에 뒤이은 자민당 내부의 경선이 파벌간의 힘겨루기에 따라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총리를 새로 추대하자 곧바로 "일본의 개혁은 아직 멀었다" 는 실망이 나라 안팎에서 일었다.

엔화는 추락했고 뉴욕 타임스는 오부치 총리를 '식은 피자' 라 불렀다.

다행히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喜一) 전 총리를 대장상으로 임명하는 등 내각 구성에서 점수를 만회한 오부치 총리는 위험했던 '3개월 관문' 을 넘어 이제 '3년 관문' 을 향해 가고 있다지만 일본 정치에 대한 평가절하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중도좌파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당수를 새 총리로 뽑은 독일 총선은 유럽의 이웃나라들만이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제3의 길' 이라는 중도좌파의 새로운 사회체제 실험에 독일도 합류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슈뢰더는 최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를 찾아 같은 정책 노 선을 걷기로 합의하는가 하면 '신 (新) 중도' 를 표방하며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사회 이익집단간의 새로운 합의를 끌어내자고 나섰다.

냉전 이후의 글로벌경제 질서가 부닥친 경제위기 속에서 독일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사회체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미국 중간선거의 주제어는 단연 "르윈스키여 안녕" 이다.

르윈스키 스캔들 때문에 미국의 리더십이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는 걱정들이 미국 안팎에서 많았지만 미 유권자들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그런 불안을 많이 잠재우고 미국 정치의 체면을 세웠다.

애초부터 경국지색 (傾國之色) 과는 거리가 멀었던 르윈스키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급속히 잊혀져갈 것이다.

최근 몹시 비대해진 모습으로 아침 운동길에 나선 그녀의 모습이 다시 매스컴을 타기도 했지만 그런 화제나 좀 더 뿌릴까, 르윈스키 스캔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 정치의 중심에 있지 않다.

미 유권자들이 르윈스키를 통해 안녕을 고한 것은 '국민생활과 동떨어진 공허한 정치싸움' 이다.

당파적 대립으로 격화된 섹스 스캔들은 이번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반면 민주당이 치고 나간 교육.사회보장 등 이슈들이 투표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는 공화당의 공세 앞에서 수세가 역력했던 민주당에 오히려 하원의석을 더 준 미 유권자들은 "정파싸움이나 일삼지 말고 국민생활에 더 신경써라" 는 경고를 공화당에 보낸 셈이다.

지난해 대선, 올해 지방선거를 치른 우리는 이제 2000년의 총선을 앞두고 있다.

국가부도 직전에 다들 정신없이 치른 지난해 대선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괜찮았다.

선거를 통한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국제적 이미지, 노동계의 지지 등이 좋은 평가를 받은 요소였다.

요즘같은 국제통화기금 (IMF) 시절에는 그런 평가가 국가의 신용등급과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 모두들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로부터 또 한번 평가를 받을 2000년 총선은 사실 그리 멀지 않다.

올해가 지나고 나면 벌써 사회는 선거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고 한국 선거에 대한 세계의 평가도 새로 시작될 것이다.

올해 치러진 일본.독일.미국의 선거는 유권자나 여야 모두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

모처럼 좋은 평가를 받고 난 지금 우리는 혹시 '식은 피자' 나 되굽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사회적 합의는 잘 이뤄져가고 있는가.

국민들이 넌덜머리를 내는데도 정치는 정파싸움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2000년 총선의 주제어는 지금부터 정해지고 있다.

김수길(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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