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제2부 13.내금강 보덕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금강산의 계곡미를 대표하는 만폭동은 금강대로부터 비로봉을 향해 올라가는 10리 계곡이다.

왼쪽으로는 향로봉 (香爐峰) , 오른쪽으로는 법기봉 (法起峰) 영봉들이 호기있게 내달리는 그 사이 골짜기는 마치 하나의 화강암 통돌로 된 듯한 매끄러운 바위 위로 푸르다 못해 비취 빛을 내는 계류가 미끄러지다 부서지고 치달리다 깊게 고이니 만폭동은 "담 (潭) 아니면 폭포요, 폭포 아니면 담이다. "

흑룡담 (黑龍潭).비파담 (琵琶潭).벽파담 (碧波潭).분설담 (噴雪潭).진주담 (眞珠潭).구담 (龜潭).선담 (船潭).화룡담 (火龍潭) 등 8개의 못을 보통 팔담이라고 부르며 외금강 상팔담과 구별해 내팔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폭동에는 여덟개의 못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강산의 요정인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았다는 옥녀세두분 (玉女洗頭盆) 도 있고, 고려 때 회정 (懷正) 선사가 물에 비친 관음보살을 보았다는 영아지 (影娥池) 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데 있었으면 멋진 이름을 얻고도 남음이 있으련만 여기서는 그저 둥근돌물확 정도로 불리는 것도 몇이나 더 있으니 차라리 만폭동이라 할 것이지 팔담은 종시 가당치 않다.

아무리 보아도 만폭동의 산과 계곡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조화의 극치였다.

팔담의 여러 못이 저마다 크기와 생김새에 어울리는, 혹은 곧고 혹은 누운 폭포를 어깨자락에 척 걸치고 있는 것이 보기에도 신기한데 향로봉 산마루에는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자바위가 있고, 법기봉 꼭대기에는 참선 자세로 앉아 있는 부처바위가 있으니 그 기발하고 신기함은 산과 계곡이 서로 뒤지지 않는다.

계곡이 선녀라면 바위산은 선남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선남선녀의 도열을 받으며 무작정 가고 있는 내금강 탐승객들은 누구인가.

그래서 예부터 만폭동의 노래에는 신선 선 (仙) 자가 빠지는 일이 없었고 그 초입 바위엔 아예 오선 (五仙) 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은 대 (臺)가 있다.

이쯤 되면 인간의 한낱 된 기교란 참으로 미미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무리 빼어난 자연미도 인공 (人工) 의 자취 하나를 가할 때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한 차원 승화되는 법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벼랑에 부처를 그리고 산중에 암자를 짓곤 했다.

그런데 누구라 감히 이 장려한 천하절경의 거대한 풍경화에 화룡점정 (畵龍點睛) 하듯 인공을 내세울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하면 이 신기하고 오묘하고 기발하고 변화 많은 자연과 걸맞은 집이라도 한 채 세울 수 있을까. 이런 스스로의 질문에 바로 이것이요 하고 답하듯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법기봉 천길 낭떠러지 중턱에 오직 바지랑대 같은 기둥에 의지해 있는 보덕굴 (普德窟) 이다.

보덕굴은 보면 볼수록 놀랍고 신기롭다.

사람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도 위태로워 보일 것인데 누각 한 채가 장대 하나에 의지해 있다니.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여기에 암자를 지은 것은 627년이라고 했다.

보덕은 암자를 짓고 그 아래 있는 작은 굴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 때인지 그 굴 앞에 누각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이 보덕굴인 것이다.

이를 위해 높이 7.3m 되는 나무기둥에 19마디의 구리판을 감아 거기에 의지해 마루판을 얹고 집을 지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것만도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데 가는 기둥에 큰 집이 올라앉은 듯한 과장을 보이려고 기와지붕을 얹으면서 눈썹지붕부터 시작해 팔각지붕.맞배지붕.우진각지붕을 층층이로 엮어 멀리서 보면 마치 3층집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게 보덕암과 보덕굴로 구성된 이 작은 절집이 6.25때 폭격으로 암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보덕굴만이 스님 떠난 지 반세기도 더 되는 세월을 지키면서 우리 같은 답사객이나 만나면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몇백년이나 되었을까. 지금 북한에서 나온 금강산 안내책자는 1511년에 보덕굴 기둥이 세워진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보덕굴의 역사는 그보다 더 오래 된다.

그것은 고려 때 익재 (益齋) 이제현 (李齊賢) 이 지은 보덕굴이라는 시가 증명한다.

먼 골짜기 바라보면 바람이 시원하고 아래를 굽어보면 시냇물이 파랗구나 돌층계에 쇠사슬을 가로질러 놓았는데 바위에 의지한 건 구리기둥 뿐일세 세상에! 6, 7백년 전에 이런 모험적 건축을 시공한 것이 있다니! 저 구리판으로 감싼 나무기둥집이 6, 7백년을 견디고 있다니!

그렇다고 해서 이 집이 만폭동에 거만하게 자리잡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우람한 법기봉의 기세에 위축된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초가에 잘 어울리는 제비집 같은 금강산의 석연굴 (石燕窟) 이라고 했다.

나는 분설담에서 부서지는 물보라를 애들처럼 열십자로 팔 벌리고 흠씬 젖어본 다음 허궁다리 건너 돌계단 딛고 올라 보덕굴을 향했다.

보덕암 빈터는 제법 반듯했고, 익재가 노래한 돌층계 쇠사슬은 여전했다.

조심조심 보덕굴로 내려가 허공에 떠 있는 마룻바닥에 발을 디디니 크게 흔들릴 것 같은 집이 견딜 만했다.

그것은 바위에 깊이 박힌 쇠줄로 누각은 허리띠를 단단히 조여매져 있고, 그것도 모자라 가위줄로 두번 더 질끈 동여맸으니 꿈쩍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루판에 광솔 빠진 구멍으로 내려다보니 발 아래는 끝 모를 낭떠러지다.

남쪽으로 난 여닫이 창이 있어 문을 열어젖히고 살짝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찬미에 찬미를 거듭하며 올라온 만폭동 긴긴 골짜기가 한눈에 안겨오는 것이었다.

본래 풍경화란 창을 통해 본 자연이라더니 보덕굴 창틀을 액자로 삼은 만폭동 그림은 완벽한 것이었다.

이 전망을 위해, 그리고 그 멋을 위해 보덕굴이 세워진 것이었다.

보덕굴은 금강산이기에 어울리고 금강산이기에 가능한 건축인 것이다.

금강산이 천하제일의 절경이라면 보덕굴 역시 천하제일의 환경 건축인 것이다.

육당은 보덕굴을 이렇게 찬미했다.

"…보덕굴은 진실로 진실로 현실 그대로의 이상, 생시 그대로의 꿈같은 광경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천교 (天巧) 를 빼앗을 인공 (人工) 이 있지 않겠지만 오직 한번 만폭동의 보덕굴에서만 천지조화도 잊어버린 일을 사람이 번듯한 보탬을 하였습니다….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