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니스 모리세트 새앨범 수작 호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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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96년 겨울, 세종문화회관. 푸른눈의 갓스물 여성 로커가 단독무대를 가졌다.

꽉 찬 4천여 객석 절대다수를 점한 소녀팬들은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감정이 이입된 합창으로 그녀의 열창을 따라갔다.

압권은 후반부 터진 '넌 알아야 해 (You Oughtta Know)' .변심한 남자에 대한 여인의 저주를 직설화법으로 폭발시킨 이 노래에 소녀들은 자신들의 경험 (?) 을 이입하며 열심히 따라불렀다.

이 여가수, 앨라니스 모리세트 (24) 는 95년 '넌 알아야 해' 를 담은 데뷔음반 '재기드 리틀 필' 을 2천8백만장 (전세계) 팔아치워 벼락스타가 된 캐나다 아가씨다.

그녀의 매력은 일단 벨벳 천의 촉감같은 부드러움과 벌처럼 톡 쏘는 날카로움을 겸비한 매혹적인 창법에 있다.

'제2의 제니스 조플린' 칭호를 안겨준 시원시원한 목청도 강점이다.

그러나 그녀의 최대 강점은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곡을 쓸 줄 아는 싱어 송라이터란 점이다.

그 모리세트가 3년만에 신보를 냈다.

(3일 전세계 동시발매) '서포즈드 포머 인패추에이션 정키 (한때 좀 놀아본 아이)' 란 긴 제목의 이 음반은 데뷔음반으로 벼락스타가 된 가수들이 흔히 겪는 '소포모어 징크스 (1집보다 뒤지는 2집)' 를 멋지게 극복한 수작이다.

음반은 놀라우리만치 원기왕성하다.

몽환적이며 풍요로운 사운드의 이면에는 여러 장르의 벽을 거침없이 뛰어넘는 대담함이 두드러진다.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의 펼침 화음, 헤비메탈의 포효, 힙합의 흥겨움이 한데 뭉쳐 부글댄다.

직설적인 내지름을 벗어나 깔끔하고 우아해진 모리세트의 목소리도 일품이다.

전작의 '분노' 대신 '솔직' 과 '성숙' 이 신보의 키워드인 듯하다.

모리세트는 수록곡 17곡중 13곡을 직접 작곡 (프로듀서 글렌 발라드와 공동) 했고,가사도 전부 본인이 썼다.

가족과의 관계, 지난해 방문했던 인도에서의 깨달음, 거대 음반사 조직에 둘러싸인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까지 다양하다.

"이제 약은 그만/배부른 데도 먹는 것은 그만/맹목적인 목표도 이젠 그만/의미없는 명예도 그만…/인도여, 신이여, 환멸이여, 허무함이여, 맑음이여, 그리고 침묵이여, 감사한다. " 이렇게 노래하는 타이틀곡 '댕큐' 는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반성의식마저 안겨준다.

모리세트는 데뷔음반의 대성공으로 팝계에 '젊은 여성 싱어송라이터' 붐을 일으켰다.

국내에도 큰 파장을 미쳤다.

그녀의 창법을 따라하는 여가수들이 부지기수다.

하나 그녀의 진짜 미덕은 별로 수용되지 않은 것 같다.

기성가요 문법을 벗어나 자기주장이 담긴 개성 있는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는 음반 내기 힘든 풍토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대부분의 국내 여가수들은 몇몇 인기작곡가들이 찍어내는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 춤곡을 읊어댈 뿐이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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