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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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태호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아담한 2층 벽돌건물에 걸려 있는 다방간판은 '어제 같은 날' 이었다.

하루 종일 그 맞은편에다 좌판을 펴고 구색 맞춰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변씨로선 처음 본 다방간판이었다.

다방 이름을 그렇게 길게 쓴 것에도 호기심이 갔지만, 어제 같은 날이란 간판 글귀에서 연상되는 것은 태호의 말처럼 이상하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제라는 시간에는 언제나 좋은 것들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다방 창가 자리에 앉으면, 길 맞은 편인 한씨네 좌판이 한눈에 바라보일 위치였다.

처음엔 시무룩하던 변씨는 힐끗 태호에게 눈길을 보낸 뒤 길을 건너 다방으로 올라갔다.

의성에서처럼 젊은 놈에게 혼찌검이 나더라도 구원요청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란 생각을 하면서…. 환하게 밝은 실내에는 대여섯의 탁자가 놓여 있었으나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시골도시 다방이란 예나 지금이나 티켓장사나 배달위주로 차를 팔기 때문에 옛날처럼 한복을 거추장스럽게 차려입고 다방을 지키는 마담이란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방 주인이 손수 차를 끓이면서 주문을 받기 위해 주방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다방을 접객장소나 담소의 장소가 아닌 티켓장사나 배달주문을 받기 위한 대기실과 같은 장소로 전락한 셈이었다.

그런데 '어제 같은 날' 이란 글귀와 걸맞게 그 다방은 역시 한산했지만 마담이란 존재가 있었다.

나이는 마흔다섯살 안팎 쯤으로 보였지만, 보기에 따라선 삼십대 후반으로 속인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앳된 얼굴의 마담은 마침 스포츠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다가 화들짝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변씨로선 그 진의를 가늠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마, 이런 산골에 웬 마도로스야. 물론 변씨의 구레나룻을 발견하면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란 짐작은 가능했다.

변씨는 그 혼잣소리를 냉큼 되받아서, 그러니까 요사이 배가 산으로 기어오르는 변고가 전국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거요. 두리번거리다가 좌판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 자리를 찾아 털썩 주저앉는데, 마담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수 한 컵을 탁자에 공손하게 올려 놓으며 그녀는 말했다.

아, 정말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이에요. 이제부턴 뭔가 될 것 같거든요. 승부내기를 해서 내가 이겼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으시죠? 물론이었다.

변씨는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엉뚱한 말을 하고 있을까. 이번엔 여자에게 곤욕을 치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마담은 얼굴이 상기되기까지 하면서.

"사실은요. 아침에 길 건너에다 좌판을 펼 때부터 손님을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팔고 있는 물건들이 오징어이기도 했지만 손님의 모습을 보니까. 외항선 선장 같기도 해서 종일 손님네들의 좌판만 내려다보면서 가슴을 조였어요. 요사이 구레나룻 기르고 다니는 사람 흔치 않아요.

그러다가 내 혼자서 한가지 승부내기를 만들었어요. 일행 중에서 저 마도로스로 보이는 분이 다방에 와서 차 한잔 하고 가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좌판 거두어서 훌쩍 떠나버리면 내가 지는 거예요. 그렇게 작정하고 혼자서 종일 줄다리기를 하면서 가슴을 조이다 보니까, 일손이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긴장이 되어서 몸까지 뻣뻣해지던 걸요.

왜냐하면 혼자서 작정한 승부내기였지만 상품을 걸었거든요. 내가 지게 되면 애들한테 오늘밤에 오만원어치 외식을 시켜 주기로 했거든요. "

"그런데 내가 와서 차를 마시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하기로 했소. " "그건 미처 생각해 두지 못했어요. 아마 이긴다는 자신이 없었던가 봐요. 그런데 지금 물으시니까, 갑자기 생각났어요. 이렇게 됨 제가 이긴 것이니까. 선생님이 저한테 저녁을 사시면 어때요?"

"아깐 그냥 손님이라더니 이젠 깍듯이 선생님이라 부르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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